페미니즘과 마음의 역설

타인의 미움, 분노, 비난을 감내하는 것이 왜 유익한가?

by 김상혁

난 내가 남자라는 것이 원죄인 것마냥 한 6년을 넘게 혼자 고민했다. 대학 시절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학과에서 늘 화두였다. 그 때 나는 여성주의 기조를 가진 학생회와 자주 의견다툼이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잘 모르는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대하지 말자는 선에서는 그 문제의식에 계속 해서 점점 더 공감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문과대학 학생회장을 할 무렵, 우리 학과에서 어떤 사건이 공론화가 되려고 했다. 그 당시 시점에서 1년도 더 지난 일이었고. 내가 학과 학생회장이던 당시 거의 모든 신입생 남자애들이 초대되어 들어가있던 페이스북 그룹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에 대해 지금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는건데. 나는 그 당시 남자애들이 상당한 윤리적 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 페이스북 그룹에서 올라왔던 글들과 내용의 '대상'과 '수준'의 정도는 그 당시 다른 학과에서 '언어성폭력'이라 불리던 다른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면 더는 그런 말들을 함부로 페이스북 그룹에 올리지는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말을 하기가 정말 두려웠다. 하지만 사실이다. 대부분의 아니 내가 살면서 만난 거의 모든 남자들은 그 정도, 아니 그 정도보다 더한 것들을 보고 듣고 나누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기며 살아왔다. 그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나는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남자(아빠를 포함한)들을 마음 속 끝까지 욕하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그 때 나는 당시 그 사건이 공론화되는 과정에 섣부르게 개입해서 '어떤 입장'을 글로 써 보냈고. 그 글은 2차가해가 되어 5번이나 사과문을 쓰게 되었고, 사과문을 보내는 것, 게시하는 것 조차 2차가해가 되는 지경이 그 당시 내가 받아들인 상황이었기에. 그 입장이 이렇게까지 비난 받을 일이었음을 내가 받아들인다면, 나는 절대로 내 주변의 아무 반성없이 사는 남자사람들을 마음으로 받아줄 수 없었다. 이걸 지금 글로 쓰는 내 심경이 어떠냐고? 당연히 두렵다. 벌써 8년이 지났기 때문에 두려울 게 하나도 없는데도. 마치 아슬아슬한 윤리적 완벽함에서 내가 벗어나면 난 죽을 것이라도 되는 양 하는 감정을 넌지시 느낀다.



그래서 그 6년의 자책의 시간이 허송세월이었냐고? 그건 아니다. 한국에서 남자로서 살면서 내가 그 기간동안 했던 성찰들을 하는 것은 아주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죽이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왜냐면 성찰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잘 지키면 자유로 향하기 때문이다(당연히 과거의 나는 선을 잘 지키지 못했고, 음푹진푹 날뛰었다). 내가 했던 것은 나를 향한, 특히 내가 남자로서 겪어왔던 것을 향한 미움, 분노, 비난을 감내하는 일이었다. 타인의 미움, 분노, 비난을 감내하는 것이 왜 유익한가? 보통 타인의 미움, 분노, 비난을 다 감내해야한다고 철저하게 믿고 자책의 굴레로 빠져버리는 사람의 문제가, 미움, 분노, 비난을 긍정하지 못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남성이 페미니즘을 수용하는덴 큰 모순이 하나 있다고 결론 내렸는데. 여성인 사람에게 페미니즘은 결국 자신의 입장과 자신이 겪은 일들을 용기내어 소리치는 것에 관한 것이라면, 남성인 사람에게 페미니즘은 거의 주로 타인의 입장과 타인이 겪은 일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봐야 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그 모순이다. 하지만 모순에도 길은 있다.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모두 자기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성성을 가진 인간들이 여성성을 가진 인간들을 억압하는 데에는, 남성성을 가진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억압과 관련이 있다는 점. 따라서 타자의 고통과 피해, 어려움을 공감하고, 성찰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에는 기필코, 그 타자의 고통과 피해, 어려움을 자기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따라야 한다. 모순은 또 다른 모순으로 깨어진다. 여성성이라는 타자의 입장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책과 성찰의 길에 들어선 남성이, 더 이상 타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입장을 갖기 시작할 때. 그 성찰과 자책은 비로소 종료되고 완성된다. 그 때부터 자유는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은 역설적이다. '내가' 더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고, '내가' 더 편하게 요구하려고 하는 그 과정에, '나를 향해'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나를 향해' 더 편하게 요구하는 타자가 장애물로 서있다. 무엇이 더 나를 목표지점에 가깝게 하는가? 자유롭게 표현하고 편하게 요구하는 타자를 이해하는 길인가? 그러면 자기 자신은 일시적으로 죽는다. 말문이 막히고. 귀를 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어진다. 아니면, 자유롭게 표현하고 편하게 요구하는 타자를 부정하고 나의 입장을 더 단단히 표현하고 지키는 길인가?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모든 존재가 자유롭게 표현하고 편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깨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전자의 관점이 더 마음의 자유로 향하는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타자의 미움과 비난을 모두 감내하고나서야, 비로소 나의 미움과 비난 또한 타인이 마땅히 감내할 필요가 있다는 굳건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모두 받아져야 할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감내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기는 나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또 역설적인 것은, 마음이 그런 자유에 돌입하고 나면. 그 자유에 돌입하게 만든 과거의 과정들을 결코 나에게, 타자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미움과 분노와 비난을 타자에게 쏟아붇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미움과 분노와 비난을 나에게로 흡수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입장은 굳건해진다. 자책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되돌아보는 남성으로서의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적 마음이 엄청 흔들리는 마음이었다면, 오히려 자책과 자기를 돌아보는 일을 그만 둔 남성으로서의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적 마음은 더 굳건하다. 마땅히 표현되어야 하고 마땅히 분출되어야 하는 것들이라 믿는다. 그걸 그냥 지켜보는 걸 넘어 자기 문제로 가져가 또 깊은 창으로 자기자신을 찌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인정한다. 또한 끝없이 미움을 타자로부터 내면 속으로 끌어당겨 감내한 결과. 내 안에서 '미워하는 나'가 새롭게 태어난다. 끊임없이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미워할 자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미워할 자유가 탄생하는 것이다. 미움을 외부로 바라보고 계속해서 긍정의 시선과 마음을 전달한 결과, 비로소 내 내면 속 미움이 나타날 용기를 얻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끝없이 참고 감내하고 견딘 결과 그 모든 흔들림을 감당할 힘을 획득하는 듯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평온함과 긍정이라는 말로 무표정의 인간, 무반응의 인간을 최고의 인간인 것처럼 추앙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끝없이 참고 감내하고 견디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을 곧이 곧대로 표현하는 누군가들의 목소리였고. 끝없이 참고 감내하고 견뎌서 얻은 힘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것은 새롭게 탄생한 나의 목소리의 자유를 더 생동감 있게 실천하는 일이다.



2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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