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자동반응이 나의 삶이었다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이제 나보고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글을 쓴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상당히 외부로 향해져있었다. 올해 6월까지 나는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솔직히 말하면,, 난 어느정도 사람을 살리는 글을 써보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실제로 그 글들에 쓰여진 생각들이 나를 마구마구 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 글을 쓰면서 내가 살아난다고 느꼇다. 그리고 그 글을 글방에 공유했을때마다 사람들은 생생한 감흥들을 내게 퍼부어줬다.
나는 진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진실이 있기 때문에, 너와 나의 사이에 여백이 있고. 그 여백을 망치지 않는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구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구한다'는 '찾을 구'보다는 '구할 구'이다.
서로를 찾아서는 서로가 살 수가 없고, 서로가 서로를 구해야 서로가 살 수가 있다.
나는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지점을 늘 통과해야만 내가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에. 난 느 그 지점을 그 당시에 주시했던 것 같다. 굳이 이름붙이자면 그 마음을 '사랑의 마음'이라고 해보자. 지금은 그 사랑의 마음의 가동이 많이 멈췄다. 왜냐면 난 정말 그 때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상황과 사람들의 모습들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애쓰려고 이해했기 때문에. 정말 그 마음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계속해서 풀가동한 상태였다. 그 풀가동한 상태가 생각보다 평온하구나 하고 느꼈다. 내 내면은 평온한데, 내 주변 사람은 평온하지 못한게 문제였다.
상담선생님, 스님, 부모님, 친구 너나 할 것없이 다 나를 걱정했다. 그 와중에 나를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또한 감사하다. 지금은 그 때 자각한 그 큰 마음을 내 안으로 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마음의 파동을 나의 몸과 일을 움직이는 동력을 삼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엔 그게 참 힘들었다. 차라리 그냥 내 마음을 바깥으로 다 퍼붓는게 편했다. 내 몸과 일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그 마음을 쓰기에는 내 몸이 버텨나질 못했던 것 같다. 아니, 버텨나지 못할거라고 걱정하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이 큰 마음을 나의 몸 속으로 넣으려고 하다보면, 내 빈 자리를 은연중에 계속 자각하게 된다.
겉으로는 자신감 넘치는 소리들과 포부들을 밝히면서도, 은근슬쩍 그 아래 아직까지 맺혀있는 나의 결점들이 내게 보인다.
그런데 그 결점들을 무시한다. 그 결점따위 좀 묻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도 괜찮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 결점의 모양을 좀 확인하기 위해 이번 글을 쓰고 있다.
그래야 내 안에 내가 제대로 감당해본적없는 동력이 들이 닥쳤을 때, 내가 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약간 내 스스로가 부끄럽다. 내 현재 상황에 대해 평탄하게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있다.
내가 정말 엄마 돈 아빠 돈 덕을 보고 있으면서, 나 자신을 평온하다고 평가할 자격이나 있는걸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돈 없어도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왜 나는 그걸 거부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버리는가? 하는 자책감도 든다.
가끔은 내가 그냥 처절한 패배자 같다. 서울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멀리 시골로 내려가 거기서도 막상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못난이 같이 느껴진다.
새로운 또래들과 사회성 좋게 뭔가를 함께 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속으로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니까 나는 내 할 일을 하는거야'라고 자기합리화를 씨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실은 심각하게 열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열등감이 피어난다.
나 덕에 엄마가 그림 그리고, 내가 할머니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삼촌들과 잘 지내면서 아빠의 삶의 무게를 같이 짊어져주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냥 결국 나는 가족들을 축내는 존재가 아닌가. 아직도 제대로 사람 구실 못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지하려고 혈안이 된 한심한 놈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위와 같은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잣대가 항상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그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자동반응이 나의 삶이었다. 삶은 마치, 현재도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오로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현재완료진행만이 전부같이 느껴졌다. 삶이 공중에 둥둥 떠있는, 그렇다고 과거랑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평탄하게 미래로 이어지지도 않는 작은 나무 막대기 같았다.
나는 큰 나무가 되고싶나보다. 그래서 뿌리를 더 깊게 박기를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가족으로 더 스며들고, 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나를 받쳐주는 든든한 땅을 디딛고, 내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양분들을 될 수 있으면 다 흡수하고, 척박한 땅을 떠나 좋은 땅을 찾아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정말 내 씨앗이 단단히 감추고 있었던, 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 때문에 피어낼 수 있는 꽃과 나무를 저 하늘 높이 피어내고 싶은 건데. 깊이 뿌리를 박아 오롯이 하늘을 바라봤을 때 하늘에서 퍼붓는 햇빛을 받아 나는 저절로 자라날 것인데. 빨리 큰 나무가 되고 싶어서 깊이 뿌리박는 일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더 큰 나무가 되어야겠다. 더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한다. 모든 부정적 생각들을 전복시켜야 한다.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큰 나무가 되어 나를 지지해주고 나에게 양분이 된 모든 것들에게 그늘을 주고 양분을 되돌려주고 생명의 에너지로 넘치게 해주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야겠다. 나무막대기로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깊이 뿌리를 박아, 더 높게 펼쳐진 나무가 되기 위해선 말이다. 더 훨씬 큰 나무가 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다.
내려놓기. 시골에서 4개월 정도 산 나와 서울에서 놀라온 두 친구가 산장에 갔던 적이 있다. 그 때 나방이 갑자기 방에 들어왔는데, 애들은 그 나방에 신경이 뺏겨 그 나방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에 혈안이 되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저렇게 신경쓰지? 저건 그냥 나방인데'
2022년 부터는 여름이 되어도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더운건 맞다. 온도가 높고 습도가 높다. 근데 그래도 '아 왜이렇게 더운거야'하고 짜증이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려놓다보면, 내게 주어지는 현실을 그냥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임과 수용. 마치, 工 라는 한자가 내 안으로 수용되다가 말면 짜증이 난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빼내야 하는건지 숙 깊이 박아버려야 하는건지 갈등하게 되면서 긴장이 생긴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나방이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들어와버린다. 여름의 무더위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와 버린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 마치 내 눈에 보이는 바닥 타일 무늬와 같은 자극이 된다. 다만 내가 선택하는 것은 그것에 집중할지 말지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에 감사할지 안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받아들인 모든 것들은 감사라는 필터를 통해 또 한 번 내 안에서 걸러진다.
뿌리박기. 그렇게 감사라는 필터를 거친 工 들은 이제 내 안에 뿌리박기 시작한다. 따라서 내려놓는 과정은 어쩌면 감사라는 필터도 거치지 않고 내가 아무렇게나 뿌리박아 놓은 것들을 다 뽑아버리는 것을 포괄한다. 감사할 필요 없고, 아직 감사하지 않은 것들, 심지어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도 내 안에 깊이 박혀있기도 하다. 그것들이 마치 땅 속에 버려진 플라스틱 사탕껍질처럼, 내가 온전히 감사해서 내 안에 깊숙히 뿌리박아야 하는 것들에 툭 툭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뿌리박기를 주저한다. 수용까지 하고, 감사까지 한 것들이 힘을 잃기 시작한다. 그럼 내 내면의 땅은 더 플라스틱 쓰레기들에 노출되기 좋은 땅으로 다시 변한다. 따라서 툭툭 걸릴 때마다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박아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흙 밖으로 내몰아야 하겠다.
좋은거구나.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마주한다는 건 말이다. 기회다. 이렇게 결점과 빈자리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말이다. 좋은 것이 그것들이 아직 잔재물로 남아있는 자리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혼자 움막을 파고 살아있는 외지인들을 마주친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싸워야 한다. 그들을 때려눕히건, 그들을 회유하건, 그들을 매수해서라도 뿌리가 제 자리를 찾아가 끝까지 나아가게 해야한다.
나는 더 가라앉는다. 내 숨은 폐의 중간 쯤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폐의 깊숙한 바닥을 찍는다. 숨을 위로도 아래로도 올리지 않고 딱 그 중앙 자리에 유지시키기 위해 바짝 힘을 주고 있던 어깨와 머리의 힘은 빠진다. 그렇게 가라앉은 중력으로 마땅히 내 안으로 더 깊이 박혀야할 뿌리들은 더 아래로 나아간다.
또 새롭게 마주할 것이다. 더 깊이 박혀져 있었던 플라스틱 조각들, 쇳조각들, 유리 파편들. 끝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바닥은 나왔다. 내려놓으면 내려놓을 수록 끝없는 허공이 나오지 않았고, 언젠가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바닥이 나왔다. 따라서 오염된 영역 또한 언젠가 다 지나갈 것이다. 남은 건 말랑말랑하고 끈적하게. 뿌리가 더 수월하게 박힐 수 있도록. 그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더 단단히 퍼진다면. 계속해서 내 마음을 침범하는 오염물질들이 머지 않아 저절로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외부에서 받은 모든 좋은 양분들을 끝까지 흡수한 결과 뿌리는 더 너른 면적으로, 더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양분을 취할 수 있는 내 내면의 새로운 세계에 닿게 될 것이다.
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