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그만두게 되었지만 내심 어렵지 않게 다시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7년을 쉬지 않고 일했으니 한두 달은 쉬어야겠다 싶었고 오래도록 버킷리스트에 남아 있었던 유럽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 바로 지금이야‘라는 내면의 울림이 있었다. 인생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아주 잠깐의 시간일지언정 멈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번 휴식이 끝나면 그다음 휴식까지 기약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이것저것 재지 않을 용기를 주었다. 준비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로 진행되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21일간의 서유럽 여행을 신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렵지 않게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무지와 오만이 초래한 판단 착오였다. 나이는 많았고 스펙은 빈약했고 나의 경력으로 일할 만한 일자리도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성실히 살아온 사람은 잘 살지 않을 수 없다 ‘는 인생철학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불안이 엄습해왔다. 명백하고 거대한 불안이었다. 여윳돈이 없었고 기댈 곳도 없었다. 당장 스스로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혈혈단신의 몸이었다. 몸과 마음이 두려움으로 꽁꽁 얼어붙어서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불안이라는 낯선 감정에 사정없이 휘둘리며 놀아나고 있었다. 그제야 엄마의 잔소리들이 마음에 와서 닿았다. ’ 안정된 직장이 있어야 한다 ‘, ’ 울타리가 되어줄 가정이 있어야 한다 ‘는 지금까지 한 글자도 수긍하지 않았던 잔소리들이 이제야 진가를 인정받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내 마음 한자리에 들어앉고 있었다.
괜찮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내 삶이, 나의 존재가 예고 없이 나타난 불안 앞에 어깨가 축 처지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 참 별것 아닌 사람이었구나.‘라고 한순간에 자기부정의 감정에 휩싸였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한순간 잿빛으로 변해버렸고 안 좋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는 일들까지 미리 걱정하기 시작했다. 불안에 잠식되어 인생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은 잘못하지 않으면 절대 받을 리 없는 벌점 같은 것이 아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늘어난 인생살이의 노하우만큼 같은 양으로 우리 안에 쌓여가는 것이다. 단지 좋을 때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세상에 대한 호기로움이 한 풀씩 꺾여 더 이상 도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쯤 불쑥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불안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늘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녀석이지만 몰랐을 때와 알게 되었을 때의 세상에 대한 시각은 완전히 달라진다.
냉정해졌다. 그래서 길이 없는 것인가 하고 찬찬히 따져보기 시작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꼭 예전과 같은 위치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의 전환에 있었다. 달라져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지난날들처럼 취직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일자리를 내가 만들자고 생각을 바꾸었다. 조그만 학원을 시작하게 되었고 성실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다. 불안은 지금도 항상 나와 함께 있다.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다만 불안에 잠식되어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견제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 불안이 나를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은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어찌 불안이라고 해서 나쁜 점만 있겠는가. 잘 꼬드기고 익숙해져서 한평생 사는 동안 문제 일으키지 않도록 달래 가며 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불안해도 괜찮다, 인간은 원래 불안한 존재다 ‘라고 다독이면서 말이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지금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삶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잘못 살아왔다고 후회하고 자책할 수 없는, 사랑하는 시간들로 채워진 나의 인생이다. 나는 인생의 시간들을 무책임하게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믿고 있다. 성실하게 살았다면 불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불안과 함께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