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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식으로 풀어헤친 사랑의 담론...

by 우주에부는바람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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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12월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93년 10월에 4쇄가 발행된(내가 소유하게 된 것은 그래서 93년 이후라는 이야기) 롤랑 바르트의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너무나 오래 간직하고 있던 책이라 누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었느냐고 물으면 냉큼 읽었지,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번에 책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니 전혀 읽지 않은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어디 한 군데 밑줄 그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말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철석같이 이 책을 이미 읽은 책이라 여겼던 것인지 모르겠다.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나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을 읽어 제끼던 시절 그렇게 묻혀서 입에 되뇌어지고, 책은 책꽂이 한켠에 묻히게 된 것은 아닐까. 


여하튼 책은 (이미 80년도에 고인이 되어버려 농담하기 송구스럽지만서도) 누가 프랑스 사람 아니랄까봐 현학적이고, (번역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그들의 문장이 갖는 특수성일지도 모르지만) 절과 구의 혼잡이 극심한 문장으로 읽기는 버겁다. 하지만 이런 미로들을 조금은 큰 걸음으로 건너갈 재간이 있다면 시작과 끝을 환하게 내려다보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제목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이 책은 사랑에 대한 짧은 생각들의 모음이다. 롤랑 바르트가 "1974년에서 76년까지 파리 고등연구실천학교의 세미나에서 '사랑의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정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의의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책은 사랑에 대한 구조적인 관찰의 결과물이다. 물론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하나의 심리적 상황으로 보고 이를 철학적으로 파악한 다음(작가는 이것이 사랑의 철학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하여 사랑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를 무작위적인 알파벳 순서로, 그러니까 랜덤으로 나열했다고 하지만, 읽다보면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순서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만남과 진행, 스킨쉽과 섹스, 이별과 슬픔 등이 차례대로가 아니라 때로는 순서를 바꿔가며 또는 동시에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사랑에는 순차적이라는 의미 자체가 성립 불가능이 아닐까.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랑에 대해 차츰차츰 전진해 가는 독자의 마음은 일정한 흐름을 갖게 되어 버린다.) 그 구조를 축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사랑의 각각의 단계와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태를 거창하게 명명하고, 이를 무수한 담론들의 첨부와 함께 분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이러한 의문보다 앞서는 것은 학문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이미 책이 출간된 70년대 말에도 충분히), 그 자리를 섹스와 이색적인 사랑의 형태가 채워가는 동안에도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구나 하는 반가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가움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랑을 향해 들이대는 철학자 특유의 비범한 사유와 베르트르의 슬픔이라는 텍스트를 토대로 하고 있는 구체성과 보편성으로 어줍잖지만 환호가 된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서러운 감정으로 나의 책읽기는 마무리된다. 왠지 이렇게 사랑에 대한 담론을 읽을 때마다 사랑은 이제 창조되는 무엇이 아니라 반복되거나 번복되고, 기억되거나 잊혀지고, 해석되거나 분석되고,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무엇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이다. 사회적으로도 또 개인적으로도 말이다.


* 이 책의 매 챕터는 하나의 단어와 그에 대한 짧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그 서두를 부연설명하는 식이다. 이 80개의 단상, 그리고 그 단상의 핵심이 되는 단어 중 몇 개만 여기 옮긴다.


근사한 adorable.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을 이름짓지 못하여 조금은 바보 같은 근사하구나! 라는 말에 귀착한다.


취소 annulation.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의 대상을 취소하게 되는 언어의 폭발.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자체이지, 그 대상이 아니다.


파국 catastrophe.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상황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결정적인 막다른 골목이나 함정으로 체험하여, 자신이 완전한 파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격렬한 위기.


공포 cannivence. 사랑하는 사람은 연적과 더불어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 이미지는 이상하게도 그에게 어떤 공모의 즐거움을 야기한다.


이미지 image.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에서보다, 보는 것에서 더 많이 온다.


질투 jalousie.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리트레 사전』)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사전의 이름.


우수 langueur. 소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사랑의 욕망의 미묘한 상태. 


물건 dbjets. 사랑의 대상이 만졌던 물건이면 모두 그 육체의 일부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


왜 pourquoi. 사랑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가를 집요하게 자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다만 말하지 않을 따름이라는 신념 속에 산다.

 


롤랑 바르트 / 김희영 역 /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 문학과지성사 / 1991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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