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도 아닌 사람과
류근, 상처적 체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막연할 때가 있었다. 공식도 아닌 것 같고, 몇 개의 단어의 조합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나의 지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미래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나를 나락으로 빠지게 하면서 동시에 그 가운데에서 구해내는 희망이기도 한 감정. 제대로 다룰 줄 몰라 제 멋대로 튀는 럭비공 같은 감정이 사랑은 아닐까. 내가 들었던, 그리고 해왔던 모든 비유 중 가장 사랑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사랑은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저도 잘 모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상대가 제대로 알 만한 확률은 희박하며 대부분의 첫사랑은 어린 나이에 찾아드는데.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좌지우지하는 것도 어려울 나이에. 하필이면 이 기막힌 사랑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 그렇게 쌓여가는 것들은 환상 같기도 했다. 환청이 들리는 것도 같았고, 또. 더러는 그럴 때도 있었다.
몇 번의 사랑이 지나간 뒤, 환상이 쌓아 올린 누각이 무너진 뒤에, 이제는 그 감정 때문에 혼자 울고 웃는 것으로 족하다는 마음이 생겨날 무렵, 이상형이 바뀌었다. 웃는 게 예쁜 사람, 웃을 때 인디언 보조개가 있는 사람, 너는 모르겠지만 나의 지난 이상형들은 어설펐던 첫사랑의 잔재들이었다. 잔재들을 모두 치워내고 나니 이상형이 너무 밋밋해졌다.
나를 천국에 보낼 수 없지만 지옥에도 보낼 수 없는 사람, 이 순간을 함께하지만 나의 과거도 미래도 될 수 없는 사람. 어쩌면 나는 이제 나를 더 사랑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