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교대역 바로 앞 꼰꼰 건축 사옥 4층에 재민이 데스크에 앉아 듀얼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왼손으로는 피아노 치듯 박자감 있게, 타격감 있게 기계식 키보드를 타다다닥 두드리며 타이핑을 하고 있다. 이따금 경쾌하게 스페이스 바를 탁탁탁 세 번씩 누른다. 오른손으로는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된 버티컬 마우스를 움직이며 열심히 딸깍딸깍 클릭한다. 화면에는 건축사사무소에서 쓰는 캐드 프로그램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마젠타색, 싸이언색. 그림은 다양한 색깔로 그려져 도면이 된다. 재민은 건축가이다. 아니다. 건축가라고 하기에는 건축사도 아니고 건축 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회사원이라 생각한다. 회사원으로써 일에 충실하기 위해 기계처럼 도면을 치고 있지만 재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정도로 일에 익숙해졌다는 증거다.
삼일오 내채공 만기… 삼일오 내채공 만기…
재민이 2022년 3월 15일을 기다린 지 벌써 1년 3개월이 넘었다. 꼰꼰 건축에서 한 해를 보내고 2년 차 사원이 되던 첫날 깨달은 ‘나는 건축설계가 싫다’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두 가지 믿음은 재민에게 퇴사의 꿈을 갖게 했다. 현재 재민의 목표는 3월 15일, 내일채움공제 만기이다. 정부와 회사에서 근로자에게 경제적으로 기여해 2년 동안 목돈을 만들어주는 내일채움공제 만기 문자를 받으면 바로 소장에게 달려가 퇴사를 말하는 것이 재민의 목표이다. 2년이라는 목돈을 만드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재민은 반드시 성공할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재민의 인생이 그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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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꼰 건축 사옥 4층에서 캐드를 치고 있는 재민은 순탄한 삶을 살아왔다. 그의 이력을 읊어 주자면 다음과 같다: 199X 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기독교계열의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당시 전국에서 12번째로 잘 나가는 동네였던 대전시 전인동에 위치한 전인 초등학교를 나왔다. 재민을 포함한 학생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변호사 거나 연구소를 다니는 박사님, 근처 벤처 타운에서 벤처 기업을 운영하는 CEO의 자제들이었다. 재민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따라 태국을 가게 된다.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에 가서 어떤 교육을 받았냐고? 재민은 한적한 시골 골프장 안에 있는 영국계 인터내셔널 스쿨—국제학교를 굳이 이렇게 쓰다니—을 다니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모든 공부를 영어로 했고 친구들 또한 인터내셔널 스쿨답게 다양한 배경을 —다양한 부의 배경이라고 해야 하나—갖춘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나름 학업에 욕심이 있었던 재민은 학급에서 2번째로 높은 성적을 거두고 졸업한다. 그 후 재민이 선택한 대학교는 영국 잉글랜드 북부에 위치한 맨체스터에 있는 맨체스터 대학교였다. 건축을 하고 싶어 건축과에 들어갔는데 QS 세계 대학교 랭킹 과목별 순위에서 당시 건축학으로 5위를 달리는 대학교였고, 출신 건축가로는 영국 건축을 대표하는 대가 노먼 포스터가 있다. 20대 전부를 재민은 영국에서 석사까지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국내 주거 건축 부문 1위를 달리는 꼰꼰 건축에 입사하게 된다.
어떤가? 태어나서부터 쭉쭉 상한가를 치고 올라가는 재민의 삶이다. 그런 재민은 다음 상한가를 노리고 있다. 바로 퇴사도 아닌 탈건축도 아닌 탈회사원이었다. 재민은 꼰꼰 건축을 다니며 더 좋은 환경을 탐했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 먹고사는 삶. 재민은 이걸 회사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홀로서기’라고 표현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퇴사 후 좋아하는 일로 월 200을 버는 것. 그것이 사업이 될지, 창작이 될지, 소셜 인플루언서가 될지 재민은 규정하지 않았지만, 월 200을 버는 단계까지 간다면 다시는 어떤 회사에도 취업하지 않을 계획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고 반드시 이룰 것이다. 재민은 항상 성공해 왔기 때문에 인생에 실패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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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잉. 재민의 핸드폰이 부르르르 떨린다. 재민의 초점은 모니터에서 핸드폰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드디어 기다리던 문자가 왔다.
(청년내일채움공제 만기 안내) 청년내일채움공제 만기를 안내드립니다. 한국벤처진흥공단 홈페이지에서 만기신청하시기 바랍니다. 만기금 신청은 핵심인력만 가능합니다. 신청일로부터 7일 이내 승인 및 지급처리 신청일 기준 순차 진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재민은 문자를 받고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의자를 굴려 옆자리에 있는 콩사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한다.
“콩 사원님. 저 내채공 만기 됐어요. 바로 갑니다.”
“헐. 대박! 대리님 바로 지르는 거예요? 진짜 부럽다 정말.”
“네. 바로 갑니다. 저 먼저 갈게요.”
재민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찌나 당차게 일어났는지 의자는 밀려 뒷자리에 앉은 용 과장 자리 가까이 간다. 재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신 소장에게 걸어간다. 재민의 상사인 신 소장은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재민을 힐끔 쳐다본다.
‘뭐야. 또 뭔 일이야. 일 바빠 죽겠구먼. 아까 시킨 일은 다 했나? 손이 빈걸 보니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신 소장 옆자리 작은 회의 테이블 앞에 앉은 재민은 신 소장에게 마땅한 듯 이야기한다.
“소장님. 저랑 잠깐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요?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여기서 하면 안 되는 거야? 역삼동 프로젝트 문제 생겼어?”
“아뇨. 그건 아니고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둘은 4층 중앙에 있는 유리로 둘러싸인 회의실에 들어갔다. 단 둘이 마주 보고 앉은 재민과 신 소장. 신 소장은 걱정 없이 당당하고 거침없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의 재민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또라이 같은 놈. 또 뭔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신 소장의 생각이 끝나기 전에 재민이 먼저 말했다.
“소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되었으면 합니다.”
“ ! ! ! ! ! ! ! ? ? ? 퇴사! ! ? ”
신 소장은 갑작스러운 재민의 퇴사 발언에 놀란 듯하다. 하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재민 대리. 혹시 회사에 불만 있어? 왜 갑자기 나가려 그래?”
“아뇨. 저 불만은 없어요.”
“그런데 왜 그래? 아니 내가 퇴사를 막는다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그래.”
“저 작년부터 고민했는데 건축 설계 일이 저한테 맞지 않는 것 같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요.”
“작년부터 고민했다고? 들어온 지 얼마 됐다고 벌써 그런 고민을 해? 재민 대리. 꼰꼰 건축이 얼마나 좋은 회사인지 몰라? 연봉도 높고 좋은 프로젝트도 많은데, 다른 데로 이직하려 그래?”
“아뇨. 이직은 아니고 퇴사만 하려고요. 오래 고민했는데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건축 설계에서 커리어 이어가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라서요.”
“뭐!? 이직도 아니고 그냥 퇴사? 너 이제 막 대리 달았는데! 너 인마! 지금 너! 나가면 너!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차분한 재민과 조금은 격양된 말투의 신 소장. 재민은 그런 신 소장을 보며 생각한다.
‘뭐가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됩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