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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Feb 21. 2024

미래냐? 현재냐?

데리다, 들뢰즈, 푸코로 대변되는 현대철학은 회색지대에 있다. 플라톤 이래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 헤매던 철학자들은 이제 모든 것을 선과 악, 즉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보는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중간 어딘가의 지점을 찾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공자가 이야기했던 중용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나 같은 문외한이 어찌 철학자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겠냐만은, 이러한 현대철학의 접근법이 부부간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다툼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철학을 배워야 하나 보다.



          평소 까마귀가 크냐 까치가 크냐를 놓고도 말다툼을 하는 - 당연히 까마귀가 크다. 이런 걸 왜 우기는지 - 우리 부부이지만, 유독 제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처음인 데다가 특수교육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것이 없어 싸우려야 싸울 수가 없다. 어느 정도 알아야 자신의 생각이 생기고, 본인만의 주장이 있어야 다툼이라도 할 게 아닌가? 게다가 제이 주변에는 뛰어난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센터에는 관련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놀이치료 선생님과 언어치료 선생님이 계시고 어린이집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 원장님이 계신다. 간혹 서로의 생각이 갈릴 때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제이의 미래가 더 중요하냐, 현재가 더 중요하냐'의 문제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제이의 미래에 비중을 더 두어야 하나, 현재에 비중을 더 두어야 하나'이다. 이 문제만은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제이에게 미래와 현재는 모두 중요하고 우리 둘 다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즉, 시간과 돈이 문제다.



          아내는 제이와 잘 놀아준다. 단순히 재미있게 놀아주는 것만도 아니다. 아내와의 놀이는 제이의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아내가 진료를 줄이고 저녁시간을 제이에게 할애한 이후 제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말도 많이 늘었고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빈도도 높아졌다. 관계 형성을 연습하는 데 있어서 특수교육기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엄마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단, 아내가 제이와 보내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한의원은 어려워진다. 엔간히 큰 한의원이 아니고서는 대개 대표원장의 진료시간이 매출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거의 강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의 효율을 중시한다. 특히 새벽과 오전 시간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런데 일주일에 두 번, 나는 제이를 센터에 데리고 가야 한다. 그것도 황금 같은 오전시간에 말이다. 한 번에 2시간 남짓한 시간이지만 일의 흐름이 끊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얼마 전 제이가 그룹수업 - 성향과 수준이 비슷한 아이들을 모아 관계 형성을 연습하는 수업 -을 시작한 이후로는 수요일에는 오후시간에 센터에 다녀와야 한다. 루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무척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용도 문제다. 제이에게는 해마다 적지 않은 교육비가 들어간다. 게다가 느리게 가는 제이가 혹시 남들에게 무시당할까 염려가 돼서 인지 아내는 제이의 옷도 무지하게 산다. 이에 더해 일주일에 한 번은 새로운 자극을 위해, 그리고 일주일 동안 교육받느라 고생한 제이를 위해 어딘가로 놀러 간다. 이 모든 비용을 합치면 웬만한 사회초년생 연봉이다. 내가 십 년이 넘은 디젤차를 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 제이에게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을 사업에 투자한다면 제이의 미래는 보다 밝아질 수 있다. 제이가 끝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된다면, 성인이 된 제이의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 중 하나는 부모의 재력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아내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 하지만 제이의 교육에도 적정한 때가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는 아무리 많은 시간과 돈을 할애해도 제이는 성장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아내와 나의 의견 차이가 생긴다.



          우리 부부는 현대철학자들처럼 적정한 지점을 찾아가기 위해 많이 생각하고 많이 다투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부부만의 합의점을 찾은 듯하다. 요즘 아내는 일주일에 두 번 야간진료가 있는 날에는 진료가 끝난 후에도 새벽까지 일한다. 어차피 집에 와도 제이가 자고 있기 때문이다. 야간진료가 없는 날에는 저녁시간 내내 제이와 최선을 다해 놀아준다 - 정말 최선을 다한다 -. 대신 나는 저녁 아홉 시가 되면 제이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 그러면 아내는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 보통 뜨개멍을 때리지만 일이 많을 때는 일을 하기도 한다 -. 제이와 일찍 잠든 나는 새벽에 일어난다. 그리고 황금 같은 시간을 나에게 투자한다. 아내가 아이와 놀아주는 저녁시간에는 한의원에서 일한다. 그렇게 부족한 업무를 채운다. 토요일에는 우리 부부 모두 출근을 하고 제이는 집에서 쉰다. 대신 일요일은 우리 둘 다 제이를 위해 하루를 오롯이 투자한다.



          얼마 전 센터 언어선생님과 제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관련된 상담을 하였다. 이야기는 점차 제이의 머나먼 미래로 향했다 - 내 성향이 원래 그렇다 -. 그러던 중 언어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먼 미래를 보는 건 좋지 않아요. 힘들어서 안 돼요." 맞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이다. 너무 미래만 보느라 지금 제이와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칠 수는 없다. 이번 만은 아내의 말이 맞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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