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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22. 2024

그 어떤 것에도 오빠를 핑계삼지 않을 거야.

제4장. 오빠의 자살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이들에게

초안,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삶이 버거운 순간이 올 때마다 오빠 생각이 났어. 오빠도 이렇게 힘들었을까. 오빠는, 어떤 무게를 지고 살았을까. 그런 오빠를 생각하면 슬픔에 잠겨버릴 것 같았어. 끝도 없는 저 심해로 가라앉아버릴 것 같았어. 그럴 때마다 다짐했어. 이건 내 나약함이라고. 오빠가 내 나약함의 핑계가 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뭍으로 올라왔어.  오빠 덕분에 그 시간들 속에서, 나약하기만 했던 나라는 사람은 많이 단단해진 것 같아.

오빠의 죽음을 안고 수험생활을 이어간다는 것

 간절했던 수험 기간에는 허투루 쓰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특히 자투리 시간. 길을 돌아다닐 때는 한국사 인강을 음성으로 들으면서 다녔고, 밥을 먹는 시간에는 사자성어를 외웠다.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도중에도 영어 단어를 외웠다. 일분일초를 아까워했던 그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내려놓고 무조건 사수했던 시간이 있다. 스터디 카페에 짐을 내려놓고 앉아 책을 펴기 전. 노트를 펴 길든, 짧든 오빠에게 하고픈 말들을 털어냈다. 짧게는 한 두줄, 길게는 한 페이지씩 오빠를 향해 다짐했다. 다짐의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오빠의 죽음이, 그 어떤 핑계도 되지 않도록 할게.

 수험생활을 하면서 힘든 순간은 숱하게 찾아왔다. 예쁘고 멋있는 옷을 입고 놀러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이 주욱 늘어난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에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맨얼굴로 초라한 발걸음으로 스터디 카페로 향하는 길. 좋은 곳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찍은 사진들로 도배된 카카오톡 프로필들. 수험기간 동안 바라본 다른 이들의 삶은 화려한 색감과 음악이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뮤지컬 영화였지만, 내 하루들은 밋밋하고 재미없는 흑백 무성영화였다. 아침 여섯 시 반부터 밤 열한 시까지 쭉 책상에 틀어박혀 머릿속에 정보를 꾸역꾸역 넣고, 동그라미와 엑스로 내 노력의 가치를 평가당하는 순간들. 누구에게나 시험기간은 고통스럽다. 특히 그 시험이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결과는 오로지 전부를 얻거나 전부를 잃는 시험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수험생활을 하다 오빠 생각이 유독 짙게 나는 날이 있었다. 멀쩡하게 문제를 풀다가도 눈물이 뚝뚝 흘러나오기도 했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오빠 생각에 아무리 공부 내용을 머릿속에 욱여넣으려고 해도 들어가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내 나약함이, 내 게으름이, 오빠를 핑계 삼고 있는 걸까. 그저 공부가 하기 싫은 건데 오빠의 죽음을 핑계 삼아 내 평안을 꾀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오빠에 대한 상실감으로 힘든 걸까.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힘이 들었던 건지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 혹은, 수험생활 때문에 아니면 오빠의 죽음 때문에, 이렇게 딱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 일일수도 있다. 힘든 수험생활에 고통스러웠던 오빠의 죽음까지 더해져 조금 더, 아팠던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독히도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 슬픔에 잠겨버린 날, 후회가 사무치는 날, 그리움에 잠식되어 버린 날. 공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날에는 그 이유를 온전히 나의 문제로 돌렸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도망치고 싶은 건, 공부를 하기 싫은 네 게으름 때문이라며 몰아세웠다. 오빠를 떠나보낸 슬픔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빠한테 못할 짓이었다. ‘그래, 난 지금 슬퍼서 도저히 공부가 안 돼. 오늘은 좀 쉬자.’ 이 말만큼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내 나약함에 지고 말아, 시험에 떨어진다면 비겁한 나는 분명 오빠를 핑계삼을 터였다. 오빠 일만 없었으면, 흔들리지 않고 계속 공부를 이어가 결국 합격했을 텐데, 중간에 큰일을 겪어 방황하고 말았다고. 그렇게 말하고야 말 것 같았다. 내 두 입으로 그 말을 내뱉는 건 끔찍했다. 아니, 두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그저 머릿속에 그 생각을 담는 것만으로도 오빠에게 미안해서 차마 오빠를 떠올릴 자격조차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겨내야 했다. 그게 공부에서 오는 힘듦이든, 오빠를 상실한 유가족이라는 것에서 오는 힘듦이든. 내 슬픔이 어떻든, 내 고통이 어떻든, 젖어가는 페이지를 무시하고 책장을 넘겨야 했다.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서, 오빠의 죽음에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나는 시험에 붙어야 했다.

첫 번째 시험은 생일, 두 번째 시험은 기일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 수험생 신분을 벗어던지니,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다. 졸업을 위한 필수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22학점, 9과목을 들어야 하는 강행군이 펼쳐졌다. 거기에 졸업요건으로 토익 850점이라는 관문이 주어졌다. 9과목을 들으며 토익공부를 해야 하는 점을 현실적으로 고려한다면 수업도, 과제도, 시험도 널널한 과목들을 선택하며 나머지 시간에 토익공부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수험생 물이 덜 빠졌는지, 대학이라는 배움의 전당에서 학문에 흠뻑 빠져보고 싶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듣는 마지막 대학교 수업들이기에 한 과목 한 과목이 아쉬웠다. 결국 얻어가는 건 많지만, 과제가 많고 시험이 어렵기로 유명한 교수님들의 수업들로 빼곡히 채워진 시간표가 되었다. 4학년 2학기 시간표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오전과 오후가 빼곡히 찬 시간표를 들고 마지막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기껏 수험생활을 벗어났는데, 일과는 수험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눈을 비적비적 비비며 일어나 (코로나 19로 인해 수업은 모두 비대면으로 이루어졌다.) 화상강의 앱을 켜고 오전과 오후 내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거의 매 수업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했다. 과제를 하고 나면 20시 남짓. 그러고 나선 밤늦게까지 인강을 들으며 토익 공부를 했다. 그러다 보니 토익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던 나는 쉬이 응시 신청 버튼에 손이 가지 않았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시험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정도가 지난 뒤에야 토익 기본서를 한 번 다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책을 한 권 떼고 나니 이제는 시험을 봐야겠다고 결심이 들었다. 10월에 있는 토익 시험을 접수하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응시할 수 있는 날짜가 딱 한 개밖에 없었다. 오빠의 생일이었다. 응시 신청 버튼을 누르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오빠가 떠나고 처음 맞는 생일이었다. 이 날,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시험을 볼 수 있을까. 그렇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12월에는 입직하고 나서 지낼 자취방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10월과 11월 밖에 없었다.

 오빠 생일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시험장을 가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오빠 생각이 유독 짙을 수밖에 없던 날이었기에. 그렇지만 또 나를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또 오빠 핑계를 대고 있는 건가. 내가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다면 오늘이 어떤 날이든, 어떤 정신으로 시험을 보든 좋은 점수를 낼 수 있어야 했다. 내 부족한 실력을 인정하기 싫어서 오빠를 핑계는 것 같았다. 살면서 처음 보는 토익 시험이 떠나간 오빠의 생일날이라니.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오빠, 여태껏 그래왔듯 난 내 부족함에 오빠를 핑계삼지 않을 거야.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과 상념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시험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또한 잘 이겨내고, 개운한 마음으로 오빠를 만나러 가자고 다짐하며 인생 첫 토익 시험을 쳤다. 모의고사를 몇 번 풀어보긴 했지만, 시험장에서 푸는 문제들은 느낌이 또 달랐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험이 끝나고,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노란 메리골드 꽃다발을 사서 오빠를 찾아갔다. 오빠, 우린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반드시 행복은 찾아올 거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자. 그런 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 우리에게 찾아온 행복을 웃으면서 나누자. 노란 꽃들 사이사이로 희망을 꽂아 넣은 꽃다발을 오빠에게 건네며 집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로 응시했던 토익 시험은 졸업 요건에서 10점이 부족한, 840이 나왔다.

 조금 더 열심히, 토익 공부에 전념했다. 주어진 수업 과제들을 하나하나 해나가고, 토익 문제를 하나둘 풀어가며,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났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빼곡하게 채워나가다 정신 차리고 보니 11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첫 토익시험을 보고 난 후, 다음 토익시험 날짜부터 정했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까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다급히 토익시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계획적으로 시험을 준비하지 않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11월에 내가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시험은 오빠의 기일이었다. 이 날만큼은 피하고 싶어, 그 뒤의 시험을 찾아봐도 토익 점수 제출 기한 전까지 내가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은 딱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 이쯤 되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왜, 그전 날일 수도, 그다음 날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딱 오빠 기일인 거야. 어쩔 수 없이 응시 신청을 하고 난 다음부터 계속 불안했다.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실은 지금 생각해 보면, 입직하고 일을 다니면서 틈틈이 토익 공부를 해도 됐을 터였다. 오빠가 떠나간 이후로 나를 몰아붙이는 데에만 익숙해졌던 나는, 내게 그런 관대함을 베풀 생각조차 못했다. 이겨내야만 했다. 포기, 실패,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에는 오빠를 핑계 삼고 싶지 않았다. 미련할 만큼 지독한 오기였다. 이건 내 나약함의 문제라고. 난, 오빠 기일에 시험을 봐야 해도, 이겨내야만 한다고. 내 나약함에 오빠를 변명 삼지 않겠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고생을 사서 했다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오빠에 대한 죄책감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에 비이성적인 그 선택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성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오빠의 기일 날, 오빠를 위해 기도를 마치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했고, 결연했다. 오빠, 오늘 꼭 졸업 요건 따내고 오빨 찾아갈게. 씩씩하게 시험을 보고 오빠를 만나러 갈게. 그리고 자랑할 거야. 오빠,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무사히 마쳤다고. 그렇게 나약하던 막냇동생이 이렇게나 단단한 어른이 되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마음 정리를 못해서 어수선한 마음으로 시험을 봐 망쳐버렸다고 징징대고 싶지 않았다. 하늘에서 지켜볼 오빠가, 혹여나 털끝만큼이라도 미안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머리가 차분해졌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용기가 차올랐다. 그렇게 오빠의 기일에 응시했던 두 번째 시험은 905점. 첫 번째 시험보다 65점이 올랐고, 졸업 요건보다 45점이나 높은 점수였다.

내 나약함의 변명이 되지 않도록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대단하다고 했다. 오빠에 대한 상실을 겪은 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오빠와 관련이 짙은 날들에 토익시험을 봤지만 결국 고득점을 받아낸 것에 대해. 실은 그건, 나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해서 이뤄낸 성과들은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본연의 능력치가 만들어낸 결과들이 아니었다. 오빠를 핑계 삼지 않겠다는, 오빠를 향한 죄책감이 만들어낸 일종의 ‘피버타임’이었다.


 오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내가, 오빠를 핑계 삼을 자격이 없다며 나를 다잡았다. 내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오빠의 죽음을 변명 삼고 싶지 않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오빠의 죽음은, 그저 오빠의 선택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내 삶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든, 그건 내 선택이자 내 역량이지 오빠 ‘때문’인 일들은 없어야 했다. 오빠는, 내 인생에 ‘덕분’인 사람이지 ‘때문’인 사람이 아니어야만 했다.

 그렇게 지독하리만큼 처절했던 몸부림들 덕분에, 나는 이제 제법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 속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오빠를 핑계 삼고 싶지 않았던 나약한 나는, 알을 깨고 나와야만 했다.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쏟고, 죽음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세상 속에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오빠의 마지막 선택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그 어떤 변명으로도 둘러대지 않는 단단한 사람으로 다시 거듭나야 했다. 여전히 나는, 알을 깨고 나오는 중이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될게요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감은 눈을 뜨면 너무 아픈 마음도

담대히 버텨낼 수 있기를


                                  - <아무렇지 않은 사람>, 카더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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