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 인물 안평대군 이야기
한국 고전소설 「운영전」은 궁녀 운영과 김진사의 당시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불우한 선비 유영이 우연히 옛 궁궐터에서 신선과 선녀와 같은 남녀와 만나 그들의 예전 사랑 이야기를 듣는 액자 소설이다. 주인공 남녀의 비극적 결말이 깊은 인상을 주면서, 반인륜적 중세 이념과 사회질서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알다시피 궁녀는 왕족의 삶에 묶여 자기 뜻으로 사랑을 결정할 수 없는 여성이다. 기품과 교양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여인이며 다른 외간 남자와의 만남을 꿈꿀 수 없는 처지라 베일에 쌓인 듯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궁녀와 일반 선비의 사랑은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설정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엔 숱한 장애물이 등장하여 두 사람을 좌절하게 한다.
소설에서는 왕족, 궁녀, 노비, 무녀 등 다양한 인물들이 둘의 사랑을 이어주거나 방해하는데, 그중 안평대군은 사랑의 진행과 방해에 동시에 관여하고 있어 흥미롭다.
주인공과 안평대군은 선연일까 악연일까.
궁녀 운영이 모시는 안평대군은 역사속 실존 인물로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궁녀 10명을 뽑아 시서예악 등의 교양을 가르치는데, 이때 인상적인 말을 한다.
“하늘이 재주를 내릴 때 어찌 유독 남자에게만 많이 내리고, 여자에게는 적게 내렸겠느냐? ... 너희들도 힘쓰도록 해라.”
어느 날은 글재주 좋다고 소문난 어린 선비 김진사를 초청하여 시를 지어달라 한다. 대군의 명으로 운영이 곁에서 벼루를 받들게 되었고, 운명적으로 둘은 만난다. 운영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이때 내 나이는 17살이었어. 낭군을 한 번 뵙고는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웠네. 낭군 역시 나를 돌아보더니 웃음을 머금은 채 자주 눈길을 보내곤 하셨지. … 진사가 붓을 휘갈기는 사이에 잘못하여 붓끝의 먹이 내 손가락에 떨어졌는데, 마치 파리의 날개 같았어.
내가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닦아 없애지 않자, 좌우에 있던 궁인들이 모두 돌아보면서 웃고는 용문에 오른 것에 비유하였지."
이후 두 사람은 몰래 시를 주고받고 궁궐 담장을 넘는 등 비밀 연애를 이어간다. 둘을 딱하게 여긴 주변 궁녀들과 무녀, 김진사의 노비가 도와준다. 그러나 결국 안평대군에게 발각되고 운영은 문초를 당한다. 벌받고 가두어진 날, 운영은 스스로 명을 달리한다.
안평대군은 애매한 캐릭터다. 표면적으로는 악역이지만, 사실 그가 없었다면 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운영을 교육하여 내면까지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으로 만들어준 것또한 그다.
살면서 여러 인연을 맺지만, 삶의 장면과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씁쓸하게 마음을 접고 돌아서는 경우가 흔하다. 그럴 때 후련하지만은 않은 건 그간 쏟은 정성이나 마음이 아까워서, 혹은 사람을 잘못봤나 하는 자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께해서 행복했던 순간도 분명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마음이 참 복잡해진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악연인지 선연인지 결정하는 건 결국 내 현 상황과 마음이 아닐지.
운영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았다.
-이미지: 출판사 서해문집의 <운영전>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