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어렸을 때 원 없이 레고를 잔뜩 사놓고 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형제가 네 명이어서 먹는 것도, 장난감도 항상 경쟁이 심했다고 한다. 본인은 중간에 낀 넷째라 위로 세명은 형, 누나라서 양보하고, 아래로는 동생이니까 배려하다 보니, 왠지 항상 부족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 못했던 것 원 없이 하라고 남편을 위해 (아이와의 놀이에도 좋을 것 같아서)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놀이와 기차놀이와 일반 레고 세 상자를 듬뿍 사줬다.
남편은 레고를 정말 좋아한다. 나에게 뭘 원하냐고 물으면 보통 나는 꿈에 그리는 '마당과 수영장이 딸린 2층 집'을 주문한다. 신기하게도 얼추 내가 원하는 상상의 저택을 뚝딱 레고로 만들어낸다. 비행기, 헬리콥터, 잠수함, 놀이동산, 우주선, 캐슬 등 못 만드는 게 없다. 모두 사진을 다 찍어놓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다.
남편이 레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다른 비싸고 화려한 장난감들은 원래 만들어진 것에서 더 이상 창작을 더할 수가 없는데, 레고는 마음껏 만들었다 부쉈다를 반복하며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어서 자신의 상상력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귀찮은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아빠와 항상 놀다 보니 아이가 아빠의 취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만 1살부터 아빠와 레고를 잘하더니, 만 2살부터는 집, 기차, 유치원 버스, 동물원, 놀이터, 어린이집 등 레고 창작을 혼자서 하기 시작했다. 딸은 레고를 높게 쌓는 걸 좋아한다. 가끔은 자기 키보다 더 높게 쌓아서, 유아의자를 가져다 놓고, 의자에 올라가서 더 높게 더 더 높게 쌓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높게만 쌓으면 당연히 자꾸 부서지고 넘어지니까, 자기 마음대로 잘 안되면 실망하고 울기 시작한다.
그러면 부엌일을 하다가도 아빠는 달려와 딸의 레고 놀이를 코칭해 준다. 그리고아빠와 딸의 둘만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된다.
아빠와 딸의 은밀한 대화 시간, 그리고 옆에서 모른 척 엿듣는 나.
"높이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려워. 높이 쌓으면 당연히 쓰러지는 거야. 당연한 걸 가지고 화내거나 울 필요 없어. 그냥 '당연한 거구나, 원래 그런 거구나' 생각하고 천천히 다시 하면 돼." 아빠가 말한다.
자기 마음대로 안 돼서 화가 나서 울음을 터트렸던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쓰러진 레고를 아빠와 함께 다시 쌓아가기 시작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레고가 참 인생 같은 거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우리의 열망이 높아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져서 참 어려운 것이 인생이다. 목표를 위해 우리의 노력을 높이 쌓아갈수록, 높이 쌓아놓았던 성과가 무너지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도 같이 무너지기도 하고, 몸도 지쳐 쓰러지기도 한다.
그렇다. 당연한 것이었다. 높이 가면 갈수록 당연히 쓰러지고 넘어지는 삶의 이치를 가지고, 내 마음대로, 내 목표대로 되지 않는다며 화내거나 울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 당연한 거구나, 원래 그런 게 삶이고 인생이구나'라고 생각하며, '훌훌 털고 다시, 천천히 시작하면 되는 것이구나!'라고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하고 싶으면 다시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하면 돼. 조금씩 배워가야 해! 처음부터 다 잘할 수는 없어! 넘어지면 다시 하면 돼. 전혀 문제가 없어!"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 훌훌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시작하면 되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그만두어도 문제없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가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우듯이 천천히, 조금씩, 도움을 받아 가면서, 수십 번 무릎이 까지면서, 수백 번 넘어져가면서 재미있게 배워가면 된다. 어느덧,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고 있었던 아빠가 더 이상 밀고 있지 않아도,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우리 어른들이 문제 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초가 튼튼해야 해! 튼튼하면 무너지지 않아!"
딸이 큰 소리로 대답한다.
"튼튼하게! 튼튼하게!"
"그렇지 튼튼하게! 근데, 무너져도 괜찮아. 천천히 다시 하면 다 할 수 있어"
어느 정도 다시 원래 모양을 회복해 가는 레고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방방 뛰며 좋아하는 아이가 대답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다. 인생도 배움도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마음만 앞서서 목표를 비현실적으로 높게 설정하지 말고, 기초부터 조금씩 튼튼하게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초가 탄탄하면 쉽게 무너지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무너질 수 있다. 그럴 때는 천천히 다시 하면 다 할 수 있다.
무너진 레고를 하나씩 다시 복구하고 있는 아이
"레고가 무너져도 괜찮아, 그럴 때도 있어! 원래 쓰러지는 거고, 원래 넘어지는 거야, 다시 하면 되는 거야! 이거 봐! 더 튼튼해졌어! 이게 아래가 고정이 돼서, 서로 연결이 되니까 더 튼튼해졌어. 하면 할수록 기술이 늘어. 잘하고 있어, 우리 딸!"
그렇다. 가끔은 인생이 무너져도 괜찮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럴 때도 있다! 원래 쓰러지는 것이 인생이고, 원래 넘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조금 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고, 좋아하는 곳도 다녀오고, 몸과 마음이 충천되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실력을 기초부터 튼튼하게 쌓고, 배울게 많은 좋은 사람들과 서로 연결이 되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아이가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처럼, 하면 할수록 기술이 늘면서 나만의 방식과 노하우가 생길 것이다.
"진짜 튼튼해! 이거 봐, 흔들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아. 정말 잘 만들었다, 우리 딸!"
하나씩 하나씩 부서진 집을 다시 쌓아서,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낸 아이의 모습
아빠와 딸의 둘만의 은밀한 대화는 나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 딸바보 남편이 나에게 자기 딸 자랑을 하며 씩 웃는다.
"여보, 봐봐, 우리 딸은 조금만 도와주면 이렇게 혼자서도 잘해!"
안심했다. 고마웠다.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 아이가 마음이 건강하고 단단하게 잘 자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다음날 일요일, 딸은 일어나자마자 아침 7시 전부터 아빠와 함께 다시 레고 삼매경이다. 그런데 큰 변화가 생겼다. 아이는 레고가 쓰러져도 이제 울지 않았다. 웬만큼 레고가 크게 넘어져서는 아무렇지도 않다. 다시 하면 되니까!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새로 만든 레고 집, 그리고 무너지는 것에 더 이상 개의치 않는 아이의 변화된 모습
재밌는 건 더 큰 변화가 생겼다. "무너졌어요"라고 말하면서, 제법 스스로 높게 쌓은 레고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일부러 넘어뜨리면서 다시 쌓기를 반복한다. 다시 쌓으면서 예전과는 또 다른 새로운 창작물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참 잘했어요"라고 씩씩하게 소리치며, 본인이 만든 작품을 보면서 방방 뛰고 손뼉 치며 춤을 춘다. 오늘도 아이의 성장을 감탄하며, 나도 함께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된다.
아이와 함께 만든 놀이동산이다. 사진이 주는 추억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때 아이와 웃으면서 함께 만들었던 그 순간의 행복한 감정이 따뜻하고 감사하게 마음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