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홀로 걷는 뒷모습 바라보기

손을 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되는 것들

by 이음

아들이 떠난 빈 자리


1-snj21.jpg 아들이 떠난 빈 자리는 생각보다 크고 깊었다.


아들이 떠난 빈 자리는 생각보다 크고 깊었다.

아들이 가고 난 뒤, 나는 왕비님과 공주님, 그렇게 여자 둘과 함께 살게 되었다. 집안이 조용했다. 가끔 공주님께서 옹알이를 하곤 했는데 그조차도 너무 여리여리해서 연못에 조약돌을 던졌을 때 일어나는 잔잔한 파동과 비슷한 것이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시끌벅적 뛰어나와 ‘아빠!’를 외치는 사람도, 나의 손을 이끌어서 소파에 앉힌 뒤 이 책 저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서 이상했다. 저녁이 되었지만 샤워기의 시원한 물줄기로 아들의 몸을 씻어넘기는 대신, 여리여리한 공주님을 내가 조심스레 붙잡고 아내가 손에 물을 모아 씻기곤 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다시 아이가 하나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고, 심지어 아이를 재우기 전에도 부부 간의 대화가 가능해졌다. 아침에도 어린이집을 보내기 위해 부랴부랴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차에 태우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분명, 삶은 더 윤택해졌는데, 마음이 매우 허전했다. 오랜만에 생긴 저녁의 부부 간의 대화 시간은 자연스레 중국에 가 있는 아들 이야기로 채워졌다.


나: 영상 통화 한 번 해 볼까요?
아내: 그럴까요?
그런데 지금 밖에 나와 있어서 지금 통화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나: 우리 아들 오늘은 뭐 하고 지냈으려나요?
아내: 오늘 왕푸징 거리 간다고 했었는데. 잘 가고 있으려나?ㅎㅎ


우리의 삶의 빈 자리가 생긴만큼 처제의 삶은 분주함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아이와 전심으로 함께 하느라 실시간 통화는 사실상 거의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약간의 삶의 여유와 함께 깊은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꼈다. 간간이 받는 아들의 사진 속에서는 우리가 가끔 보았거나 또는 아직 보지 못했던 환한 웃음이 서려있었다.

20180705_201721.jpg 간간이 받는 아들의 사진 속에서는 우리가 가끔 보았거나 또는 아직 보지 못했던 환한 웃음이 서려있었다.


영원이는 괜찮아? 우린 안 괜찮아.


나와 아내의 감정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아이는 늘 우리와 함께였다. 우리는 함께 아침을 열며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늘 함께 먹고, 함께 다녔다. 잠을 잘 때도 함께였고, 꿈 속에서도 만나자고 하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지금 아빠, 엄마 없이도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나 없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하나 했던 걱정이 무색할만큼 아들은 행복해했다. 아들은 괜찮았다. 덜 괜찮은 쪽은 우리였다.

가끔 영상통화가 연결되면 항상 이렇게 묻곤 했다.


아들, 엄마, 아빠 안 보고 싶어?


아들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많이 보고 싶어요. 근데 괜찮아요.


아들이 유일하게 힘들다고 했던 것은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영상통화가 연결이 되어도 짧은 대화를 마치고는 곧 동생을 비춰달라고 했다. 말도 못하는 동생에게 아들은 까꿍! 까꿍!을 외치고 아빠보다 더 아빠 같은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소원이는 오빠가 자신을 예뻐하는 것을 아는지 그 까꿍 소리에 환한 웃음으로 응답하곤 했다.

KakaoTalk_20181018_183913629.jpg 아들이 유일하게 힘들다고 했던 것은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입영하던 날의 기억


십여년 전, 훈련소에 입영하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 어머니는 우시지 않을 줄 알았다. 어머니는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분이었다. 어떠한 일을 만나도 침착한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으셨기에 나에게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이자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반석, 길을 잃었을 때 빛을 비춰주는 등대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내가 당신이 마흔여섯에 낳은 귀하디 귀한 늦둥이였기에 군대를 보내는 것에 대하여 남다른 감정이 드실 것이라고도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이미 형님 둘을 군대 보내보신 분이었기에 막내에게까지 베풀 슬픈 감정이 남아있을까 싶기도 했었다.

함께 점심을 먹을 때도, 훈련소에 함께 들어올 때까지도 어머니는 별다른 감정의 표출이 없었다. 나는 내심 걱정했지만 늘 그랬듯 침착하신 어머니의 모습에 한편으로 안도했다. 그런데 이제 부모님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입영하는 빡빡이들의 대열에 뛰어들어가려는 찰나, 어머니는 내 가슴을 세 번 쾅쾅 두들기시며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마 내 기억에는 울다가 주저앉으셨던 것 같다.

입고 있던 모든 옷과 가진 모든 물건들을 반납하고, 생전 처음 입어보는 괴상한 옷들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든 첫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만나도 감정에 요동이 없던 어머니에게서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훈련소에 있는 동안, 그리고 자대에 가서도 쉽게 잊혀지지가 않았다. 나와 함께 함이 어머니께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나의 부재가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눈물을 보며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한다는 건, 자녀보다 부모에게 더 힘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던 것 같다.

10172658_661980837182876_7353829144735402263_n.jpg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한다는 건, 자녀보다 부모에게 더 힘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군대에서 사람되어 나오는 아들들, 왜 그럴까.


그 후로도 나는 몇 번 친구이나 후배들이 군대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나마 양반이었던 것이었다. 쿨하게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들은 많았지만, 어머니들은 예외 없이 통곡을 하셨다. 아버지들도 겉으로는 쿨한 척 하지만 쿨내가 진동하지는 않았다. 자신마저 쿨하지 못하면 어머니는 더욱 오열할 수 밖에 없기에 애써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들은 군대를 이미 경험해보았기에, 그리고 저 녀석이 고생을 해보면 얼마나 성장해서 나올지를 알기에 나오는 여유였을수도 있겠다.

그렇게 훈련소로 들어간 아들들은 2년이 지나 훌쩍 커서 독립된 개체로 출력되곤 했다. 이건 왜 그런 것일까. 왜 부모의 사랑을 받고만 살 때는 철부지로 있다가 부모의 품을 떠난 후에야 그들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내가 부모가 되기 전에도 이것이 참 궁금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아들의 작은 독립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고 났을 때에서야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독립’은 아들들에게 있어 가장 큰 ‘선생님’이라는 것을. 부모를 떠나 스스로 하나 둘씩 부딪혀 보는 것이야말로 이 아이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것을.

영원이는 중국에서 이모와 함께 사는 동안 이모의 지혜로운 훈련 덕분에 엄청난 독립을 이루어냈다. 이모는 영원이의 독립적인 성격, 자존심 강한 성격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영원이가 작은 것이라도 홀로 성취했을 때, 크게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영원이가 성취에 거의 도달했을 때면 이렇게 동기부여를 하곤 했다. 예를 들면 옷을 혼자 입을 수 있는 기로에 섰을 즈음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에이, 영원이 못 할 것 같은데? 이런 건 여섯 살 형아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구~!


어떤 아이들에게는 저 말이 상처가 될 수 있겠지만 영원이에게는(그리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들에게는) 저 말은 가장 큰 동기부여이다. 저 말을 들은 영원이는 어떻게든 아등바등 홀로 옷을 입어내고는 늠름하게 이모 앞에 선다.


이모는 엄지를 척 들어올리면서


오와~ 이런 거 네 살은 못하는데~ 우리 영원이 여섯 살 같다!


라고 외친다. 아들은 황홀한 이모의 칭찬에 더욱 홀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헤멘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어 갈수록 영원이는 이모 집의 많은 살림살이들을 홀로 해냈다.

20180702_093628.jpg 이런 일상이 반복되어 갈수록 영원이는 이모 집의 많은 살림살이들을 홀로 해냈다.


충성! 부모님께 전역을 신!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아니 이모라는 조교의 특별 훈련을 받고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옷을 입혀서 중국에 보냈는데, 다녀와서는 속옷부터 외투까지 혼자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가기 전에는 먹은 식기들을 설거지 통에 넣었었는데 이제는 설거지도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집안 청소는 기본이고, 장 보러 가면 물건들을 카트에 넣는 것에서부터 계산과 포장까지. 과장이 아니라 이 정도면 전역하고 전투모에 개구리 달고 나온 왠만한 남정네들보다 나을 지경이었다.

장 보러 가면 물건들을 카트에 넣는 것에서부터 계산과 포장까지. 과장이 아니라 이 정도면 전역하고 전투모에 개구리 달고 나온 왠만한 남정네들보다 나을 지경이었다.


손을 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되는 것들


솔직히 네 살 아이를 처음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들의 전역(?)한 모습을 경험하며 아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얼만큼 떠나보낼 수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을 원하는 아이들에게는 단계에 맞게 서서히 독립과 자립심을 선사하는 것이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남자 아이들은 이른 시기에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갈구하는데 그 때에 맞게 조금씩 아이를 품에서 놓아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그러한 과정들이 쉽지만은 않다. 부모가 되어보니 4년 밖에 안 키웠지만 ‘아이들의 독립이 주는 공허함’을 알 것 같다. 군대 보낸 엄마들이 왜 그 자리에 주저앉을만큼 힘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 없이 아이가 잘 사는 것 자체가 기쁘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겠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 분들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도 알겠다.

그러나 부모가 손을 잡고 있음으로서 얻는 것들만큼이나 손을 놓음으로서 얻는 것들이 많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더욱 아들을 ‘네 살’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싶지 않다. 녀석이 하고 싶은 것들, 꿈꾸는 것들을 위해 한 발자국씩 더 내딛게 도와주다보면 학문이 정하는 '나이에 맞는 발달 단계'를 넘어서, 부모의 도움 없이도 더 훌륭한 발걸음들을 걸어갈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가 생긴다.

29572253_1628453127202304_9145133497596599160_n.jpg 부모가 손을 잡고 있음으로서 얻는 것들만큼이나 손을 놓음으로서 얻는 것들이 많음을 깨닫는다.


아이의 앞모습과 뒷모습


결국 영원이가 다녀온 중국은 나와 아내, 영원이 모두에게 너무나 좋은 선생님이었다. 아들의 앞모습을 보고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아들이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 역시 인생의 큰 행복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한 행복을 십대도 이십대도 아닌 ‘네 살’에 경험하게 해 준 ‘독립왕’ 우리 아들에게, 그리고 우리나라 전 사단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조교인 이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30221932_1635098143204469_8578238481224957952_n.jpg 아들의 앞모습을 보고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아들이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 역시 인생의 큰 행복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온 일상


2018년 7월의 베이징 여행을 마친 아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앞에서 말한바대로 아들의 여행 후유증은 시시때때로 나타나곤 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돌아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 동안은 어린이집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우리가 어린이집을 너무 오래 비우면 안되어서 돌아와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나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부적응하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며, 세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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