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만남은 반드시 우리를 바꿔 놓는다.
작가 『김미아』
언젠가 결국 떠나게 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넌 만날래?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쉽게 응, 이라는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만남은 이별을 반드시 수반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행복했고, 사랑스러웠으며, 또 소중했는지와는 별개로 우리는 이별을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영화 <컨택트>는 '결국 이별할 걸 앎에도 불구하고 만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만남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결국엔 나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만남을 선택한다. 이별할때까지의 그 과정을 사랑할수밖에 없기에. 인생에서 몇 번의 거대한 만남들이 있었다.
1) 첫 사랑과의 만남.
누굴 첫 사랑으로 부를까 고민했다. 처음으로 설렘을 느꼈던 사람, 아프고 힘들게 사랑을 알려준 사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중 누구를 첫 사랑이라 불러야 했을까. 유치원 때 내게 맛있는 것만 주겠다고 작은 손으로 귤 표면의 하얀 실들을 일일이 떼주던 그 아이가 내겐 첫 사랑이었다. 눈 내리는 날, 울면서 날 찾아온 그 여린 아이도 첫 사랑이었다. 21살에 만나, 25살에 헤어졌지만 끝끝내 사랑을 알 수 없었던 그 애가 첫 사랑이었고, 내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한 그 사람이 내겐 첫 사랑이다. 그들과의 만남으로 나는 감정적으로 다채로운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결국엔 이별을 했지만(혹은 할테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감정의 파편들로 난 오늘 새로운 첫 사랑과 사랑할 힘을 얻는다.
2) 부모님과의 만남.
태어나는 그 짧은 순간만큼이라도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어머니와 마주한다. 그를 어머니라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무던하게 살아가면서 자식은 부모와의 필연적 이별을 가슴 한 켠에 미뤄둔다.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마치 '부모의 죽음'을 SF의 한 장르로 취급을 한다. 가상현실이나, 예측은 가능하지만 내겐 절대 일어날리 없는 그런 일 쯤으로. 나는 부모에게 무뎌지지 않기 위해 때때로 그들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그들의 영상을 찍고 별 거 없는 안부 전화를 녹음한다. 어떤 이별보다 슬프리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그 크기를 최대한 줄이고 싶다. 준비한다고 덜 아플 이별이겠냐만은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들을 붙잡아 놓고 싶다.
3) 반려동물과의 만남.
누군가를 기른다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던 내가 11년째 강아지를 기르고 있다. 나는 그에게 밥과 따뜻한 보금자리, 신선한 물, 깨끗한 장난감과 산책을 줬고, 그는 내게 전부를 줬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롯하게 내게 맡겼다. 가끔 그를 들어 꼭 안고 있으면 그는 천천히 몸에 힘을 뺀다. 그리고 마치 녹아버린 마시멜로처럼 따끈따끈한 몸을 기대어 온다. 겨드랑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애교를 피우는 그가 이제 할머니 강아지가 됐다. 그는 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래서 점점 더 어리광이 많아지는 걸까. 앉아있으면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코로 핸드폰을 치우고 얼굴을 비벼 오는 횟수가 늘었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신호인지, 내 얼굴을 담겠다는 신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른다.
4) 미아와의 만남.
여기서 가장 짧은 시간을 만났지만, 내겐 거대한 파도와 같았던 만남이다. 내 생애를 찬찬히 훑어보는 시간이 여태껏 없었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면 충분했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래만 보고 살았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내 영혼의 조각들과 상처들을 다시 주워 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 '내일을 위해서 살지 마. 내일은 영원히 내일에 있어'라고 말했다. 내일은 영원히 내 손 안에 담길 수 없다. 과거는 단 1초라도 돌아갈 수 없다. 내가 잡을 수 있는 건 지금 흘러가고 있는 이 시간 뿐이다. 미아는 내가 현재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다듬어 주는 역할을 했다. 아마 미아와 여러분들이 만나는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만 내겐 아니다. 아마도 내가 그를 잊어버리지 않는 이상, 그는 내 곁에 있을 테다. 결국 떠나지 않는 건 그 존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