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살에 친구와 제주의 한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바다만 1시간쯤 본 적이 있어요. 늦가을이었고 둘 다 유자차를 손에 쥐고 있었죠. 밖이 너무 추워서 나가지 못하고, 차 안에서 우리는 나란히 바다를 보았습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어요. 완전한 침묵의 1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바다를 보면서 ‘아 청춘이 여기서 끝나는구나.’라는 매우 선명하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삶에 다른 시즌이 시작될 같은 느낌에 휩싸였고, 설명할 수 없는 책임감과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스스로 이해가 안 되니까 블로그에 비공개로 메모만 해두었습니다. 아직도 월정리 바다를 떠올리면 그때 이상한 감정이 떠올라요.
왠지 인생에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예감이 든 적이 있나요?
후에 《황제내경》을 공부하면서 몸의 주기가 있다는 사실을 만났어요. 《황제내경》은 중국 최초의 의학 이론서예요. 단지 의학만이 아니라 의학과 철학이 합한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에서 파악한’ 고전이죠. 《동의보감》도 이 책을 아주 많이 인용했어요.
《황제내경》에 《소문》의 〈상고천진론〉편을 보면 나잇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장의 기운 변화를 기준으로 여자의 몸은 일곱 살을 단위로 달라진다고 해요.(남자는 여덟 살 단위고요.) 생식력을 기준으로 본 일종의 몸의 그래프라고 할 수 있어요.
다만 생식력이라고 해서 임신과 출산, 성생활만의 이야기는 아니고요. 동양의학에서 신장은 생식력의 전반, 즉 정력을 담당하는 기관이거든요. 해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일과 사랑에서 쏟는 열정으로 폭넓게 해석할 수 있어요.
황제내경에서 말하는 몸의 생체적 주기는 이러합니다.
7,8년마다 몸의 리듬이 바뀐다
여자
7세 - 신기(腎氣)가 차오르기 시작하여 유치(乳齒)를 갈고 머리털도 길게 자란다.
14세 - 월경이 때에 맞추어 나오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있다.
21세 - 신기가 충만해지므로 진아(眞牙,사랑니)가 나오고 모든 치아가 발육된다.
28세 - 뼈와 근육이 단단해지고 머리털의 생장이 극에 달하며 신체가 강성해진다.
35세 - 양명맥(陽明脈)의 기혈(氣血)이 점차 쇠하여 얼굴이 초췌해지고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한다.
42세 - 삼양맥(三陽脈)의 기혈이 쇠약해져서 얼굴이 완전히 초췌해지고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다.
49세 - 임맥이 허해지고 태충맥의 기혈도 쇠약해져 월경이 없어지므로 몸이 쇠약해지고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다. (중략)
남자
8세 - 신기가 차오르기 시작하여 머리털이 길게 자라고 유치로 갈게 된다.
16세 - 정기가 넘치고 사정할 수 있으므로 남녀가 교합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24세 - 뼈와 근육이 강해지기 때문에 사랑니가 나오고 모든 치아가 완전하게 발육된다.
32세 - 뼈와 근육이 더욱 단단해지고 기육이 풍만하고 견실해진다.
40세 - 신기가 쇠약해지기 시작하여 머리털이 빠지고 치아가 약해진다.
48세 - 안색이 초췌해지고 수염과 머리털이 세기 시작한다.(중략)
중년까지만 일단 내용을 끊었는데, 옛 문헌이라 다소 격한(!) 표현이 있지요? 그렇더라도 몸의 사이클은 한번 참고할 만합니다. 옛 의사들이 통계적으로 관찰해보니, 인간의 몸은 이렇게 성장·성숙·노쇠해가고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신장의 컨디션과 기운이 주관하면서 말이지요.
가만 보면 젖니가 빠지거나 이차성징이 나타나거나 임신을 하거나 갱년기를 맞거나 등등의 과정은 체질에 따라 또는 영양상태에 따라 몇 살쯤 차이가 나겠지만, 대체로 예나 지금이나 이 리듬은 같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의 몸이 막 발전하지는 않잖아요? 우리 몸은 지극한 고전, 아니 지극히 원시적으로 존재할 뿐이죠.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마치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사니까, 원시적인 몸의 주기와는 무관하게 살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이제 꺾였어?
신장의 기운은 여자는 28세에 정점에 이르고, 남자는 32세에 그러합니다. 개인의 차이, 성별의 차이 또 문화적 환경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서른 살 즈음은 일과 사랑의 정력이 꼭짓점에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 마루를 지나면 체력을 비롯한 모든 열정이 조금씩 내려가고요.
심리적으로 보면 위로 올라갈 때는 앞날을 잘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제 꺾였어.”가 농담이 아닌 것만 같을 때, 왠지 모를 절박한 심정이 되곤 해요. 막연하게 나를 찾고 싶은,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누구나 삼십대 중후반 즈음에 찾아오는 몸-마음의 시그널이죠.
아마도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을 사는 등의 굵직굵직한 삶의 이벤트를 다소 절박하게 하려 할 겁니다. 이미 결혼했고 안정기로 접어든 상태라면 이때부터 진짜 나 자신도 찾고 싶습니다. 일에서의 변화도 이때 많이 일어나죠. 직장에서 독립해서 자기 주도적인 일에 도전해야 할 것 같고, 지금이라도 이직해야 할 것 같고.
저는 이때 평생을 두고 해갈 공부에 간절한 마음이 들었어요. 솔직히 에너지란 게 한계가 있구나, 청춘은 지났어, 이제 남은 에너지를 좀 잘 쓰고 싶다, 설마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큰일 났다!는 심정이었어요.
열정의 색깔
그런데 몸이 바뀌었다, 새로운 주기에 들어섰다 하는 느낌을 포착할 때 주의할 점이 있어요. 단지 일과 사랑에의 열정이 예전 같지 않다, 꺾였다, 하는 느낌만을 받아들여서는 곤란해요. 실은 열정의 색깔이 달라지는 거거든요.
예를 들면 불의 종류는 한 가지가 아니죠. 이름하여 불로 통칭할 뿐 타오르는 불과 은근히 타는 불, 촛불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가 있습니다. 집안을 데우고 요리를 만드는 화력 좋은 불도 있는가 하면,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전등도 있죠. 타인의 얼굴이 보이는 정도의 가느다란 불빛이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앞길을 비추는 랜턴도 있잖아요. 어떤 불이 더 좋다가 아니라 그 불의 쓰임에 따라 불의 종류는 다를 뿐이에요.
자기 안에 열정(불) 역시 그렇다는 것을 몸을 공부하면서 알았습니다.
아는 디자이너가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사람인데요. 마흔 살에 노안이 오면서 충격을 받고 그걸 극복하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었어요. 일 욕심과 목표가 대단했기 때문에 불안감과 좌절감이 큰 상태였죠.
저는 몸을 애써 극복하려는 시도 대신에 이런 이야기를 던져보았습니다.
우리 몸이 주기를 갖고 변화해 가는데, 새로운 시즌에 접어들면 열정의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삶의 흐름 중에 어디를 지나고 있나를 사색해보는 일이 유용하다고 덧붙였어요.
꼭 제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는 그 뒤로 화려하고 전투적인 작업보다는 돈을 덜 벌더라도 천천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작업 위주로 방향을 바꾸었고, 현재는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십대처럼 일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은 머리가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 주입한 환상일지도 몰라요.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일에서 열정이 식지 않기를 바라는 일도 실은 전혀 ‘몸의 주기’에 맞지 않아요. 자기 안의 불, 열정이 이제 어떻게 어디에 누구에게 쓰일지에 따라 달라져 갈 테니까요.
혹시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편인가요?
아귀가 딱딱 맞지 않을 때 유난히 불안해하고, 계획에 지나치게 엄격한가요?
계획 세우기는 현명한 행위이지요. 그런데 그 계획이 숫자(진급이나 적금 만기일, 아이의 성장 스케줄에 맞춘)로만 되어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