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렸을 때엔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불과 10년 전만 해도 부모님이 곁을 떠날 날은 한참이나 남았다고 여겼으니, 그것은 나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3년 전쯤부터 엄마의 난청 증상이 시작되고 그렇게 또랑또랑 하시던 분이 인지장애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덜컥 겁이 났다. 엄마의 치매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슬픔이 마음을 점점 잠식하고 있다. 엄마는 확실히 예전만 못하시다. 정신적으로 가장 의지했던 존재가 점점 망가져 가는 걸 지켜봐야 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상실’이라는 단어가 와 닿기 시작한다. 요즘처럼 상실과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빠는 오래전부터 우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제는 무덤덤해 졌다. 본인의 건강에 별 관심이 없는 아빠는 이미 6~7년 전부터 몸이 망가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 죽음의 고비를 힘겹게 넘긴 이후부터 아빠는 언제든 우릴 떠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누군가를 늙고 병들게 하는 건, 곁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고 싶은, 신의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예고 없이 닥치는 상실감을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 건가, 기독교에서는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불쌍한 어린양’이라고 했다. 신은 약하고 여리기 짝이 없는 인간이 슬픔을 견뎌내고 삶을 버텨낼 수 있도록 여유를 주기 위해, 사랑하는 모든 존재를 늙고 병들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저번 주 마리가 큰 수술을 받았다. 가슴에 붙은 지방종을 떼어내는 수술이라 처음엔 위험한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술 전의 종합 검사 결과,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장병 진단을 받은 아이는 시한부와 다름없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급성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으나 마리는 앓고 있는 병에 비해 특별한 증상 없이 버텨주는 편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올해 열세 살이 되었어도 언제까지고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아이는 우리 가족에게 천천히 헤어질 준비를 하라는 얘길 하고 있었다. 양성이라고만 믿었던 지방종도 열어보니 속에는 악성으로 의심될 만한 변형된 형태가 일부 있었다. 생각보다 지방종의 뿌리가 깊고 넓어, 심장의 근막까지도 칼을 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암은 아니겠지, 아직 난 마리와 헤어질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반려견을 입양할 때 신중하게 고민해 봐야 할 점이 있다면 그건 아이가 나보다 빨리 떠날 거라는 사실이다. 인간과 강아지의 시계는 많이 다르다. 반려견과 인생을 함께 하는 보호자는 그 사실을 해가 바뀔 때마다 실감해야 한다. 아이에게 정이 들수록, 그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될수록, 언젠가는 닥칠 이별의 순간을 막연하게나마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리가 심장병 진단을 받은 후, 다소 충격적이었던 점이 있었다. 막연했던 슬픈 상상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자, 오히려 슬픔과 걱정이 마음속에서 덜어졌다는 점이다. 마리의 죽음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펑펑 났었던 내가 그 아이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확언을 듣고는 오히려 담담해 진 것이다. 한치 앞을 몰랐던 아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 안도감 같은 것, 어떻게 그 아이의 시한부 소식에 오히려 더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이기적인 마음이다. 죽음을 예고해 줘서 다행이라는, 날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 병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떠나는 게 아이나 부모님에게는 최상의 죽음일 것이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곁을 지키는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아이러니한 상황에 잠깐 웃음이 나왔다. 수술 후 몸을 추스르는 아이를 보는 마음은 죄책감과 묘한 안도감, 슬픔과 이별 뒤의 각오가 뒤엉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