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세상을 위한 선택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

by 개똥밭

참으로 힘들었던 대선이 끝났습니다. 2024년 말, '내란, 계엄'이란 빛바랜 단어가 우리의 뒤통수를 강타했지만, 그래도 깨어있는 시민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불리지만 이때만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시간도 없다고 봅니다. 저는 언제나 소위 '진보'적 인물을 지지했지만, 이 글의 핵심은 어떤 정치 또는 정치 단체에 대한 지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입니다.


그동안 필자의 글을 관통해 온 질문은 "우리는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또한 어릴 적부터 저는 ‘도덕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가’ 같은 질문에 오래 천착해 왔습니다.


인간에 대한 과학적 철학적 이해


어릴 적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이 있습니다. 들판에서 어린 동물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은 잔인하지만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은 왜 '악'으로 규정될까? 한겨울, 자기 스스로 선택한 술에 쓰러져 길거리에 방치된 노숙인을 구하는 것은 왜 '선'일까? 저는 항상 이런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은 현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인간의 협력과 이타주의는 유전자의 생존 전략에서 출발했습니다. 즉,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존속해야 하는 계산이 유전자에 입력되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호주의적 이타주의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존 확률을 높여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도덕 체계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독특함을 "허구를 집단적으로 믿는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우리는 혈연관계가 없는 낯선 이들과도 공통의 신념을 바탕으로 거대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도덕과 윤리는 단순히 유전자의 명령이 아니라, 우리가 집단적으로 합의한 사회 계약입니다. 이 계약의 핵심 원칙은 "가능한 한 많은 구성원이 함께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진화와 윤리』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자연 선택의 "적자생존"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 저항하는 윤리적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 약자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하다는 겁니다.


현실적 증거를 보면 이는 단순한 이상론이 아닙니다. 사회안전망이 잘 구축된 북유럽 국가들이 높은 행복지수와 경제적 안정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사회적 갈등비용이 높아지고, 결국 모든 구성원의 삶의 질이 저하됩니다. 이는 이 지구촌에서 일명 '후진국'이란 국가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물리학자 '존 폰 노이만'은 인간 사회를 존립시키는 철학을 '게임 이론'을 통해 수학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게임이론(Game Theory)은 여러 참여자가 서로의 행동을 고려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전략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상황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입니다. 즉, 한 개인이나 집단의 선택이 다른 참여자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그 결과가 상호 의존적으로 결정되는 상황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이 이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반복 게임'에서는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배신' 전략보다 장기적 '협력' 전략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서로를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협력적 맞대응(Tit-for-Tat)" 전략이 가장 성공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만 공격당하면 반드시 대응하는 '맞대응자들'은 '침탈자'들의 공격에 맞서 언제나 타인을 위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선한자'들과 자연스럽게 연대하게 됩니다. 여기에 계산에 따라 대세 편승하는 일부 이기적인 배신자들도 합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들 연대는 단기적으로는 큰 성과를 내는 무자비한 '침탈자' 무리와 그를 따르는 '배신자' 무리를 장기전에서 이겨내고 궁극적으로는 그 공동체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상황과 기가막히게 맞아 떨어지지 않나요?


퇴행할 것인가 도약할 것인가


우리는 긴 세월의 시행착오를 거쳐 몇가지 선택을 했습니다. 경제와 복지 분야에서는 소수가 아닌 다수가 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후 대응하는 사후적 복지에서 벗어나, 미리 위험을 방지하는 예방적 복지 시스템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습니다. 정치 분야에서는 소수 엘리트의 독점적 의사결정 구조를 넘어서 시민의 직접 참여를 확대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제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환경과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현세대의 이익을 위해 미래세대의 기회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세대간 형평성 의식이 확산되면서, 환경정책이 핵심 과제로 부상했습니다.


물론 시장경제의 경쟁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관점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시장의 창조적 파괴가 혁신을 견인한다는 주장과 과도한 복지가 근로의욕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균형에 있습니다. 적절한 경쟁은 필요하지만, 그 경쟁이 공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균형의 중요성은 동서양 철학 전통에서도 일관되게 강조되어 왔습니다. 불교의 '중도', 유교의 '중용',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모두 극단을 피하고 균형을 추구하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들을 '현자'라 부르고 따르는 겁니다.


선거는 끝났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입니다. 필자 개인적 느낌으로도 이처럼 이기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던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어느 지식인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일터에서, 지역사회에서 '같이 사는 세상'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추상적 당위가 아닙니다. 과학이 증명하고 역사가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개인의 이기적 본능을 넘어서 타인과의 협력이 본능처럼 작동하는 사회, 윤리가 경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전제가 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만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자비하게 '리셋'될지도 모름니다. 그것도 '신'이 아닌 우리 스스로에 의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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