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칩을 사러 까르푸에 들렀다. 내리쬐는 뙤약볕 때문에 짜증 나게 더웠는데 까르푸 안은 닭살이 돋을 만큼 썰렁했다. 그 온도차가 너무 심해서 잠깐 멀미가 났지만, 어쨌든 바깥이나 마트 안이나 황량한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두 팔을 손으로 비비며 까르푸 안에 있는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설렁설렁 놓인 물건들 사이,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직원들의 느린 눈동자. 느린 눈동자는 동양인을 향한 호기심으로 잠깐 반짝일 뿐, 금세 다시 초점을 잃는다. 무빙워크를 타고 2층으로.
튀니스 통신사 직원들은 정말이지 친절했다. 새로 산 유심칩을 갈아 끼워 넣고, 개통된 번호를 적은 카드와 한국 유심칩을 함께 담아 건네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미리 알아놓을걸,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땡큐, 하고 돌아 나왔다. 그들에겐 영어보단 프랑스어가 익숙할 텐데, 가게를 다 나오고 나서야 '메르시'가 떠올랐다. 메르시, 메르시, 메르시.
할 일을 끝냈지만 밖으로 나가기엔 아직 너무 더운 시간이라 한 층 더 올라가 카페에 들어갔다. 튀니스에 며칠 머물면서 느낀 건데 튀니지안들 커피를 대하는 마음은 뭐랄까, 굉장히 진중하달까? 그들은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마셨다. 동네마다 몇 개씩 저렴한 커피숍들이 줄지어 있고, 프랑스에서 건너온 지나치게 고급진 카페에도 빈자리가 없을 만큼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메뉴판에 적힌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롱블랙보다 더 진한 커피가 나왔다.
롱블랙 한 잔과 초코 페이스트리 하나를 건네받고 이번엔 '땡큐' 대신 '메르시' 하고 인사했다. 찡끗 웃어 보이는 북아프리카 남자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져 버린다. 이곳 튀니지안들은 남녀 모두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 눈도 시원하고 코도 오뚝한 게 어쩜 다 이렇게 예쁠까 싶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넋 놓고 바라본 적도 있을 정도다. 그게 언제더라, 시내에 나가 제법 커다란 서점에 들렀을 때였다. 어차피 나에게 아랍어는 외계어와도 같았으니 책 보러 간 게 아니라 사람 보러 간 서점이었다.
유럽풍의 건물들, 푸르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가로수들, 부숴지는 볕과 그 사이를 걷는 검고 커다란 사람들을 서점 창문을 통해 가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마주친 여자애 하나가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찢어 보이기 전까지는 아주 평화로웠었지. 흥, 미친년, 이라고 나는 서점에서 소리 내어 욕을 했다.
페이스트리를 손에 들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튀니지는 커피에만 진심이 아니라 빵에도 진심이다. 특히 초코 필링이 가득 찬 페이스트리나, 초코 시럽을 잔뜩 뿌린 크레페 같은 단 것들을 자주 먹는다고 했다. 뙤약볕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지글대는 지열, 아지랑이 같은 것들을 내다보았다. 아주 쨍-한 단 맛의 디저트라도 없으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 밖으로 나간다. 문자를 보낼 곳이나 전화 한 통 올 곳도 없지만, 튀니지에서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몇 개의 고유한 번호를 얻어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뜬다. 지열 따위야, 뙤약볕 정도야, 뭐. 흥, 다시 눈깔을 찢어보이라지. 까르푸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숙소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