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양이 Jul 01. 2024

11. 독일에선 기세

말을 할까? 말까?


독일에 오는 김에 주문을 하나 받았다.

주문 품목은 독일에서 산 오리털 이불에 맞는 이불 홑청.

(혹시 ‘홑청’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다른 말로 ‘이불 커버’)     

프랑크푸르트 번화가의 오래된 전문샵으로 들어갔다.

프랑크푸르트 최고의 번화가 '자일 거리'에서 만난 판다?


거기서 적당한 물건을 발견한 것까진 좋았는데

물건을 파는 여자가 어딘가 좀 불쾌하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목소리는 고압적이고,

자기의 물건을 자랑하는 건 좋은데, 그러면서 왠지 나를 좀 깔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괜한 느낌일 수도 있다.     

아무튼 사야 할 물건이라서 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사겠다고 했더니

이 여자가 진열돼 있던 물건을 다시 포장해 준다.

새 것이 없냐고 물었더니, 이게 마지막 물건이란다.

아, 내가 이 돈을 내고, 푸대접을 받아가며,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었을 진열품을 가져가야 한다고?     

그렇다고 또 다른 가게에 가서 이런 종류의 물건을 찾아내기에는

번거롭기도 하려니와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럼 어떡하지? 할인해 달라고 할까?

그런 말은 주인이 먼저 해야지! 진열품을 파는 판국에     

할인해 달라면 해 줄까? 한국이라면 시도해 볼 수 있는 말이지만

이 독일 여자가 너무 터무니없어하면 어떡하지?

가만 있자... 말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I think... Can I.... This is....     

그러고 있는 동안 이 거구의 여자는 진열품을 다시 턱 턱 접어서 포장을 마치고

내게 당당하게 물건을 내밀려 말한다.

이게 바로 그 이불 홑청. 자그마치 약 25만원짜리. 품질이 좋기는 하다.


“Cash? or card?”

나는 그때까지도 문장의 유형을 결정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연다.

“...Card.”   

  

최소한 다섯 시간은 그 일로 화가 나고 후회스러웠다.

그 순간 그 덩치 크고, 목소리 크고, 발소리 큰 독일 여자에게 큰 소리로 말했어야 한다.

I think...도, Can I....도, This is....도 아닌

‘나 이 물건 안 살래!’를.

대체 뭣 때문에 그 소리를 못한 거지? 평소처럼 잘난 척 좀 할 수 있었잖아!     

문제는 기세다.

내가 체구가 훨씬 작아도, 내가 작은 나라에서 왔어도, 내가 독일어가 훨씬 짧아도

내 기세까지 스스로 쭈그러뜨릴 필요는 없다.

아니, 모든 게 큰 독일이기에 더욱

기세만이라도 챙겨야 하는 거다.

  

<에필로그>

그렇게 어렵게 산 이불홑청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화장품 등을 쇼핑하면서 분명히 카트에 실어두었는데

잠깐 계산하는 사이에 카트와 카트 안의 이불홑청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다.

 세상에.....! 그게 얼마짜린데! 내가 그걸 어떻게 샀는데!     


그러나 절망하긴 일렀다.

줄줄이 꽂아서 정리해 둔 카트의 행렬 속에서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비닐봉지에 담긴 그 물건을 발견.

갑자기 그날의 모든 기억에 화사한 특수효과가 입혀진다.

샤랄랄라~

모든 게 다 좋았던 하루!




이전 10화 10. 나의 35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