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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Oct 20. 2024

10. 격리와 전역.(끝)

[단편소설] 탄피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그는 24인용 천막 안 접이식 야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폴로 눈병이 번지자 사단은 감염자를 격리시켰다. 연병장 끝 테니스장과 맞닿아 있는 간부목욕탕 앞 공터에 24인용 텐트가 설치되었다. 야전침대와 침상, 모포 등이 놓였다. 매 끼 의무대에서 식사추진을 하여 환자들은 무릎 위에 식판을 두고 처량하게 밥을 먹었다. 작은 티브이 하나를 중앙에 놓고 흐릿한 등불을 달았다. 유일한 낙은 티브이와 책뿐이었다. 열악한 천막으로 이주(?)한 지 이틀 만에 비가 내려 그를 포함한 격리자 전원이 비를 맞으며 배수로를 팠다. 몰래 ‘디그’ 스펠을 써 삽질을 안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라일종 상병의 얼굴과 사단장의 기괴한 엎드린 모습이 떠올랐다. 허름한 막사-아마 그보다 한참은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아. 625 때 쓰던 수통이여- 안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은 그의 침상 아래쪽을 적셨고 비가 그친 후 그는 간부목욕탕 안에 있는 헤어드라이기로 아주 오랫동안 침상을 말렸다.


여러 부대의 확진자와 함께 모여 서로 아저씨 아저씨 부르며 존대했다. 그가 속한 본부근무대에선 그 혼자 뿐이었다. 군대라는 계급사회 속 작게 피어난 민주주의를 만끽할 수 있었다. 아. 정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맞을까. 그는 이동을 제한받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없으며 원하는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민주주의를 만끽한다고 여길 정도로 이곳은 사람의 상상력을 좀먹는다. 빌어먹을 군대.


눈이 살짝 간지러울 뿐 사지 멀쩡했던 그도 격리기간이 일주일을 넘김에 따라 지쳐갔다. 소모되지 못하고 남은 에너지는 스트레스가 되어 도리어 그의 마음과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관절을 늘이고 근육을 잡아당겼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미간을 긴장시켰다. 식욕과 수면욕을 앗아갔고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마음속 갈대를 베어냈다. 무슨 과학실험이라도 하는 것인가. 어디선가 흰색 가운을 입은 몇 명이 격리된 우리를 관찰하고 있지는 않은가.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밤을 새우다 아침이 되면 그는 나날이 퀭해져 가는 눈을 뜨고 천막의 옆 면 천을 말아 올렸다. 식사추진이 오면 더러운 식판에 포크숟가락을 철그럭 철그럭 거리며 맛없는 밥과 국과 반찬을 퍼먹었다. 그나마 저녁 늦은 점호 직전에 잠깐 간부목욕탕 욕조에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는 짧은 호사가 굳은 어깨를 살짝 풀어줄 뿐이었다.


그는 격리된 채 상병으로 진급했다. 격리 상황이라 환자복만 입고 있었다. 막사로 돌아가면 바로 상병 계급장을 달아야지 다짐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군악대원은 곧 있을 연주회를 준비 중일 것이다. 막 재미가 올라온 드럼 연습을 못하게 된 일이 아쉬웠다. 그러나 연주회에서 그는 그렇게 쓸모 있는 전투력은 아니었다. 세트드럼은 그의 맞선임이 잡고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 후임인 플루트와 피콜로를 부는 우하경 일병이 더 중요했다. 만약 우하경 일병이 아폴로 눈병에 걸려 격리당했다면 군악대장은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의 쓰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쓰임이 있냐 없냐는 위태위태한 누군가를 황금 갑옷을 입은 듯, 혹은 날 선 도끼에 베인 듯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군대에서는 쓰임이 다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학습하고 훈련하고 실전에 대비하면 그것이 전부다. 그곳에서는 마력을 포함해 그가 가진 대부분의 능력은 쓸데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는 믿었다.


마침내 채현주 병장의 전역날 아침이 밝았다. 보통 군악대 연습실 막사 앞에서 전역식을 가지곤 하는데, 채현주 병장은 생활관 막사 현관 앞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부대별로 비슷하거나 다른 전역식 문화가 있겠지만 그가 속한 군악대의 전역식은 나름 독특했다. 우선 모든 군악대원이 악기를 들고 도열한 가운데 파트 막내가 한껏 괴상한 복장으로 전역자의 신고를 받는다. 전투모를 비뚤게 쓰고 상의는 벗어 러닝만 입는다. 그 위로 군번줄이 날카롭게 반짝인다. 전투복 하의의 고무링은 어디다 버렸는지 한쪽은 걸레처럼 올라가 있고 한쪽은 마른오징어처럼 축 쳐져 있다. 국방색 털양말도 한쪽만 신고 전투화 대신 슬리퍼를 신는다. 부대 복장 수칙을 있는 대로 무시한 채 신병은 선임들이 교육한 대로 전역자의 신고를 개무시한다. 걸 수 있는 딴지는 다 건다. 목소리가 작다! 경례 각이 왜 그러냐! 머리카락이 왜 이리 기냐! 집에 가기 싫냐! 곤욕을 치르는 전역자는 그러나,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리고 마침내 칼 같은 전역신고를 받아들인 신병이 큰 소리로


“충성!”


을 외치며 손을 올렸다 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정지한 순간 엔딩곡이 흘러나오듯 바로 그때 모든 부대원은 ‘석별의 정(Auld Lang Syne)’을 연주한다. 전역자는 후임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고 인사를 나눈다. 전역자가 지날 때마다 한 악기의 연주소리가 멈춘다. 트롬본이 멈췄다 이어지고, 트럼펫이 멈췄다 이어진다. 클라리넷과 플루트가 각각 멈췄다 이어지며 색소폰이 멈춘다. 다시 색소폰 소리가 들리면 곧이어 유포늄과 호른, 수자폰, 그리고 마침내 타악기들이 차례로 멈췄다 이어진다. 모든 인사가 끝나고 전역자가 뒤를 돌면 대원들은 전역자가 가장 좋아하는 행진곡을 부른다. 위대한 전진이 될 수도 있고 아리랑 행진곡, 또는 타령 행진곡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 곡이 끝나면 멀리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모두는 아련하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딱 한 번 전역식을 건너뛴 적이 있었다. 그의 첫 파트 왕고였고 드럼을 개떡같이 치던 뿔테안경을 쓴 한 병장 찌꺼기였다. 14박 15일 영창을 두 번이나 다녀온 인간이었다. 모두가 일관되게 인간 이하라 평했다. 그 더러운 성격의 라일종 상병도 그 인간의 추악함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누가 그의 전역을 축하해 준단 말인가.


채현주 병장은 모두의 신임을 받는 훌륭한 선임이었고 전역식 날 군악대원들은 모두 생활관 막사 현관에 도열했다. 저 멀리 텐트에서 그 모습을 보던 그도 환자복 상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슬렁어슬렁 연병장을 가로질렀다. 격리자 수칙에 위반된 행동이었지만 뭐 어떠한가. 마음이 닿은 선임의 전역 정도는 축하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사열대 앞 계단 아래에 서서 ‘석별의 정’을 감상했다. 다른 이들과 포옹을 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채현주 병장은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펴 입에 가져다 댔다. 담배 한 대 하자.


전역식이 끝나고 채현주 병장은 발걸음을 멈춰 막사 끝에서 그를 기다렸다. 연병장 우측으로 연결된 계단 아래에는 작은 나무 한 그루와 앉을 수 있는 넓적한 바위-누가 왜 여기 이런 걸 가져다 놓았을까-와 높이가 다른 철봉이 두 개 서 있었다. 가끔 철봉도 함께 하고 바위에 쪼그려 앉아 담배도 같이 피웠다. 그때처럼 가까이서 피지는 못했다.


“전역하니 기분이 어때? 이제 형이라고 불러도 되지?”


그는 멀찍이 서서 말했다.


“이제 돈 벌어야지. 말년 휴가 나가서 일자리 알아봤다. “


사투리 억양의 두터운 저음으로 채병장은 말했다.


“니는 좀 괜찮나? 거기 답답할 건데. “


“뭐 그럭저럭. 어려운 책 하나 보는데 할만해.”


채병장이 피식 웃으며 입과 코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길게 한 모금을 들이마신 후 ‘후우우’ 하며 길게 연기를 뿜었다. 여름은 아침 햇살이 가장 좋다. 노란 햇살에 채병장이 뿜은 연기 방향을 따라 작은 먼지들이 유영했다.


“정부가 비밀리에 마력 소지자 전수조사를 하고 있데이. 단순히 컨트롤하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지는 뭐 모르는 거니까. 조심해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담배 연기를 삼키던 그는 실제로 가벼운 잽을 맞은 듯 머리를 기우뚱 뒤로 젖혔다.


“콜록! 콜록!”


뒤로 젖힌 고개를 다시 앞으로 숙였다.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신 깊게 콜록였다. 기침이 불규칙하게 나올 때마다 잘못 삼킨 연기가 콧구멍과 입으로 뿜어져 나왔다. 어우. 아주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눈가에 빨갛게 눈물이 맺혔다. 그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채병장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깊게 숨을 들이켠 후, 길게 내뱉었다. 마법은 실존했고, 이를 연구하는 자들은 상당히 존재했지만, 마법이 여전히 존재한가는 사실은 대부분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그가 마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그의 부모와 학창 시절 일부 친구들, 전공 지도교수와 몇몇 과 동기들, 그의 첫사랑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구수한 사투리를 가진 채병장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그에게 충격과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정부’나 ‘비밀리,‘ ’마력 소지자‘니 ’컨트롤‘과 같은 위화감을 주는 단어들.


그가 저항하기 어려운 현실이 다가온 것인가. 다시는 쓰지 않겠다 다짐한 그의 마력은 결국 그에게 어떤 현실을 안길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부대 밖으로 반출한 굴러 들어온 탄피처럼. 결국엔 언젠가는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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