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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침범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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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28. 2023

침범 (10)

단편소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10.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국어사전에 ‘억수’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라는 의미다. 또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코피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 담임 선생님의 장례식은 말 그대로 억수 같았다. 우리를 포함해 그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담임 선생님을 억수같이 조문했다. 우는 이들도 많았다. 조용히 서두르는 검은 사람들과 그들이 들고 다니는 우산, 침묵 속에 가끔 들리는 흐느낌이라던가, 비에 젖은 구두 밑창과 바닥의 삑삑거리는 미끄러짐 같은 것들이 지하 공간을 무겁게 채웠다.


나는 N과 함께 담임 선생님께 조문을 드렸는데, 빈소에서 회장이었던 P가 유족에 포함되어 있어 적잖이 놀랐었다. P는 졸업 후에 담임 선생님을 꾸준히 찾아뵈었고 어찌어찌해서 사위가 되었다고 했다. P 이외에도 영쉐, 짜일럿, 선산, 잣뜨 등 시간이 맞은 몇몇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다 함께 빈소 맞은편에 차려진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소란스러움은 빈소의 무거움을 조금은 덜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은 서로 근황을 주고받았다.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거나 고단한 육아와 직장의 빌런 등 시시콜콜하지만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담임 선생님의 이후 교직경력과 퇴임, 돌아가시게 된 경위도 알게 되었다. P가 어떻게 선생님의 사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건배는 하지 않았지만 조촐하게 만들어진 동문회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 기억의 조각을 끼워 맞추며 힘겨웠던 그 시절을 완성해 나갔다.


"아, 야야야. 너네, 준모 기억나냐?"


P가 갑자기 모두에게 질문했다.


"어. 기억나지. 그 맨날 조용하고 혼자서 복도 걸어 다니던 애. 안 그래도 어제 경뒈랑 술 마시면서 걔 얘기했었는데."


N이 답했다.


"걔가… 야자 시간에 누굴 때렸는데? 누구였더라?"

"Y. Y 머리 깨졌었잖아. 걔가 아령으로 쳐서."

"그 후에 자퇴했던가, 퇴학당했던가."

"Y는 어떻게 지낸다냐? 연락하는 애 있냐?"


다들 한 마디씩 보태면서 준모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모이고 있었다.


"자퇴했대."


P가 말했다.


"아,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았냐?"


내가 물었다.


"장인어른한테 들었거든.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병원에서 갑자기 걔가 기억이 난다고 말씀을 꺼내시더라고."


P는 소주를 한잔 들이켜고 말을 이어 나갔다.


"왜, 다들 기억 안 나냐?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고3 포함해서 전체 글쓰기 대회 한 거."

"그런 게 있었나?"

"아. 그거, 학부모 민원도 있고 그랬던 거 같은데,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상한 행사 한다고."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 초에 하루 전체를 할애하여 외부로 나갔던 기이한 행사. 근처 산 중턱에 있던 잔디밭에서 글을 쓰라고 우리를 방목하는 염소처럼 풀어놓았었다. 굉장히 더웠는데, 땡볕 아래는 숨을 그늘도 없었다. 잔디밭에 앉아 말도 안 되는 시를 썼던 거 같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고 야간타율학습도 없었다. 오랜만에 공부에서 해방되어 나는 친구들과 PC방에서 몇 시간이고 게임을 했다. 당시 고3에게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냐며 학부모들의 반발이 좀 있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P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Y가 대상 받아서 다들 깜짝 놀랐잖아. 저런 멍청한 게 어떻게 상을 받았냐고. 정작 자기도 얼떨떨해했고."


맞다. 그때 상금으로 받은 10만 원인가 20만 원인가로 학급 아이들에게 간식을 쐈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근데 그게 사실은 준모가 썼던 글이었다더라. 준모가 노트에 써 놓은 걸 Y가 가져다가 지가 쓴 걸로 해서 제출했다더라. 그래서 준모가 화가 나서 야자시간에 아령으로 때린 거고."


모두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나 탄성 직후에는 잘못해서 꾸중 듣는 어린아이 마냥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야간타율학습시간에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령을 내려치던 준모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신비롭게도 때때로 어떤 기억은 시간의 세례를 비껴 너무나 선명히 남아 있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문뜩 대학 시절 당시 유행하던 온라인 개인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준모의 사진이 기억났다. 대학 MT에서 찍은 사진으로 여겨졌다. 준모는 중앙에서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두 팔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양쪽으로 각각 세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두 팔을 주욱 펼쳐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꼬리를 화려하게 펼친 수컷 공작 같은 모습이었다. 준모는 당시 유행하던 통이 과하게 넓은 긴바지를 입고 노랗게 머리를 염색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는 웃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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