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분, 22-23쪽.
어디에나 지원서를 만드는 일은 적지 않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업무 분야에 맞춤한 자기소개서와 강의 혹은 연구계획서 같은 것을 만들고, 그것들을 증명해야 하는 온갖 서류들을 갖추기까지에는 무엇이거나 하루 이틀 정도의 고된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은 그런 작업보다는 누군가 내정되어 있지는 않을까, 내가 또 들러리 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저어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러나 또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매번 절박함이랄까 하는 것도 있으니까 혹시 모르지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러자니 지원서를 쓰는 내내 피곤이 몸과 마음을 갉아먹기도 하는 것이다.
우연히 임경섭이라는 시인의 시 “와시코브스카의 일흔여섯 번째 생일”이라는 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늙어간다는 건 계속 새로운 문턱을 넘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문턱들을 넘어가는 일이 그때마다 고됐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언젠가 나도 일흔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나이란 내게 있어 끔찍하기만 하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외면받을, 아무 데에도 소용없을, 무용한 인류의 대열에 내가 껴들 것이라는 생각 탓이다.
어머니는 일흔여섯 번째 생일날 저녁 뇌경색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고 5년 가까이 요양병원에 계시다 연전에 돌아가셨다. 그 5년 동안 어머니는 오른쪽 손과 발을 전혀 쓰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말을 잃어버리셨다. 왼쪽 뇌에 문제가 생기면 언어 기능을 잃게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말은 알아들었고 사람도 알아보았다. 그런데 말을 하지 못했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우셨고, 나는 돌아서서 울었다. 말을 하지 못해서 다행이기도 했다.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집에 데려가라 하셨을 것이고 나는 집에 모셔갈 수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