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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앗의 정원 Oct 05. 2022

봄을 기다리는 겨울눈

식물이 자란다, 아이가 자란다, 나도 자란다

가지 끝에 돋아나는 연둣빛 새 잎을 보며 봄이 왔음을 안다. 여름이면 짙은 초록빛의 나뭇잎이 싱그럽다. 가을 산을 물들이는 울긋불긋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가 남는다.


겨울날 산책을 할 때면 내 눈은 나무 끝 겨울눈을 찾느라 분주하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저 앙상한 나뭇가지뿐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보면 나뭇가지에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겨울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햇빛이 부족한 겨울을 힘겨워하면서도, 사계절 중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나무는 겨울의 나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겨울 나뭇가지에 봉긋봉긋 올라오는 겨울눈이다. 겨울눈은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생겨 겨울을 나는 동안 이듬해 봄에 자라날 싹을 품고 있다. 초겨울에 아주 작은 모습이었다가 봄이 가까워오면 점점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겨울눈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모습이 되면 어느덧 봄이 오는 것이다. 


겨울눈 속에서 일찌감치 봄을 준비하고 있는 나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곧 봄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는 나무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매서운 추위와 바람, 부족한 햇빛이 아쉬운 겨울이지만 나무 끝 겨울눈을 지켜보며 무사히 겨울을 견뎌낸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겨울눈은 묵묵하게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자신의 싹을 키워간다. 느리지만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겨울눈은 힘겨운 육아의 시간 속에서도 자신만의 가능성을 키워나가려는 엄마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첫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한 뒤 1년간 오롯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매일 밤 두 시간에 한 번씩 깨는 아이 덕분에 잠을 제대로 못 자 눈 밑은 퀭해졌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사람의 눈이 이렇게 맑을 수 있나 싶은 갓난아이의 눈을 들어다보고 여린 살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치유 그 자체였다. 아이는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에게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주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달해주었다. 나만 바라보는 작은 존재를 유모차에 태워 함께 산책을 하고 햇살을 느끼고 바람을 맞는 소소한 일상이 좋았다. 아기 돌보느라 힘들진 않은지 묻는 지인에게 “아이와 힘께 있으면 치유받는 느낌이야.”라고 대답할 만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일이었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하는 것,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열심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고 일을 멈춘 채 행복한 육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년간의 한정된 육아휴직 기간이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 육아에 발목 잡히지 않고 멋지게 복직하여 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육아휴직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복직을 일주일 가량 앞두었을 때,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해 동동거렸다. 당시 어린이집 보육료 지원이 시작되면서 너도나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기 시작하던 때였다. 1년 전부터 어린이집에 대기를 걸어두었지만 복직하기 직전까지도 자리가 나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 모두 다른 지역에 살고 계셔서 육아에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살고 있던 지인이 몇 개월간 아이를 돌봐주기로 했고 나는 무사히 복직을 할 수 있었다. 


이후 회사 근처 어린이집에 자리가 생겨 처음으로 어린이집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했는데,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아침마다 울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어 하루에도 열두 번씩 퇴사를 고민했다. 


며칠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 아이는 심하게 열이 났다. 열성경련으로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달리며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아픈 것이 엄마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퇴사하고 나면 적어도 아픈 아이 가방에 약봉지를 챙겨 어린이집에 보내지는 않아도 되겠지. 전공을 살려 꿈꾸던 회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보다 아이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일, 물론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 일은 나 말고도 할 사람이 많을 거다. 나는 지금 나만을 간절히 원하는 아이 옆에 있어야겠다. 아이 옆에 있어주는 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꼭 나여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퇴사를 했다. 


회사 생활을 8년 하고 퇴사했으니 이제 육아 경력은 지금껏 살아오며 한 일 중 가장 오래된 경력이 되었다. 살면서 한 일 중에 가장 오래, 가장 몰입해서 행복하게 한 일은 육아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주는 행복과는 별개로 ‘나’라는 사람이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여야 했다. 눈에 보이는 나 자신의 성장을 멈춘 채 육아에 전념해 온 지난 10년의 시간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겹쳐 보인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열심히 일하며 커리어를 키워왔는데,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사는 내 모습을 꿈꿨었는데, 내세울만한 경력이 되지 못하는 육아를 오랜 시간 하다 보니 10년의 시간이 날아가버린 듯하다. 앞으로 내 인생은 엄마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초라하게 시들어 버리는 건가. 


그러나 그 겨울 동안 내 안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통하게 겨울눈이 돋아나고 있었나 보다. 10년간의 육아를 통해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하고 성장한 나를 느낀다. 육아를 하며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도왔다고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더욱 성장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육아는 배움의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해본다. 아이들이 나의 단점을 쏙 빼닮아 미운 짓을 할 때면 객관적으로 내 부끄러운 모습을 마주하게 돼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해 애쓴다. 적어도 10년 전의 내 모습보다 조금은 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좋고, 사랑을 표현하거나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해서도 새로이 배우고 있다.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 만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처음 마주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져도 끊임없이 도전해 결국은 걷고 뛰는 것을 익힌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조금 비틀거리고 넘어지더라도 원하는 것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구나.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배운다. 아이들과 농사를 지으면서 또한 깨닫는다. 모든 것엔 때가 있고, 아무리 크고 좋은 것도 (혹은 힘든 것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사실을 몸소 배운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것이 없다. 한 여름 어른 키 높이로 자라나 세력을 키우던 잡초들도 찬 서리를 맞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진다. 지금 발 디딘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다 보면 어느 곳에 이르게 될까.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은 금세 자라 점점 더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 줄고 나의 시간이 점차 늘어간다. 전업주부로 아이의 육아에 전념해온 엄마들은 이 시기에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에게 도움을 주며 자기 효능감을 확인해온 엄마들이라면 자신의 효용 가치가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정신없이 육아에 몰입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겨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버린 초라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그런 나에게 위로를 건넨 것은 다름 아닌 겨울나무 끝에 매달린 겨울눈이었다. 겨울눈처럼, 내 마른 나뭇가지에도 다시 싹이 트려나? 어렴풋이 희망을 갖게 한다. 누군가는 꽃을 피우고 싱그러운 잎을 뽐내는 동안 앙상한 나뭇가지의 시간을 보내온 엄마들의 노력을 응원한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안에는 새롭게 싹 틔울 겨울눈이 돋아나고 있었으리라. 봄이 되면 활짝 피어날 나의 겨울눈. 내 겨울눈은 어떤 모습의 꽃을 피워낼 수 있을지 기대하며, 오늘도 정성스레 나만의 겨울눈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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