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5. 알렉산드라, 빛나는 청춘

Ponferrada – Villafranca del Bierzo

by 비아루나 Via Luna

아침 6시 20분,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어제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막을 내려온 탓인지 다리는 납덩이처럼 묵직했다. 전날 밤 미리 챙겨 둔 삶은 달걀과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래고, 일곱 시가 조금 넘어 길 위에 섰다. 다른 순례객들 한 무리와 함께 폰페라다를 빠져나가자 도시의 끝이 서서히 멀어지고, 조용한 시골길이 열렸다.

첫 마을의 교회 앞을 지날 때, 어제 파멜라와 함께 있던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머릿수건을 동여맨 모습이 마치 옛 벨라루스 포스터에 나오는 시골 처녀 같았다. 소박하고 예쁜, 폴란드에서 온 스무 살의 알렉산드라였다.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을 보는 나의 눈은 언젠가부터 많이 달라졌다. 이십 대 때의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만 더 살이 빠졌으면’, ‘여기가, 저기가 부족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매끈하고 정형화된 아름다움만이 기준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큰 눈은 큰 눈대로, 작은 눈은 작은 눈대로, 하얀 피부는 하얀 피부대로, 까만 피부는 또 그 나름의 선명함이 보인다.


어느 미술가는 “I am not interested in pretty, I rather prefer the ugly”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예쁨’과 ‘아름다움’이 다르다는 걸 머리로만 알았다면, 요즘 나는 그 말을 몸으로 이해해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알렉산드라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잠시 나란히 걷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카미노를 걸으면서 꼭 얻고 싶은 게 몇 개 있어.”


“어떤 거?”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부모님에 대한 내 마음을 좀 풀고 싶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가 프랑스로 이민 가길 원하셨어. 나는 폴란드를 떠나기 싫었어.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고, 대학도 여기서 가고 싶었거든. 결국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고, 아빠는 엄마랑 동생만 데리고 프랑스로 가셨어. 나 혼자 폴란드에 남겨졌지. 돈은 보내주셨지만… 버려진 느낌이었어. 그때부터 아빠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자꾸 자라난 것 같아.”


“지금은 부모님이랑 자주 연락해?” 내가 물었다.


“대학교 들어와서는 좀 나아졌어. 이번에 여기 오기 전에도 프랑스에 있는 부모님 집에 들러서 가족들이랑 시간 보냈어. 그래도 마음 한쪽에 뭐가 남아 있는 느낌이야.”


그녀는 다시 말했다.


“두 번째는… 나는 좀 수동적이고 자신감이 부족한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직접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잠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알렉산드라, 넌 최소한 내가 너 나이였을 때보다는 훨씬 단단해 보여. 나는 스무 살 때 연애 때문에 생활이 엉망이었어.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사실은 콤플렉스 덩어리였고,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만 내가 괜찮은 사람 같았거든. 넌 이미 네 인생에 대해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야. 모두가 다 가는 길 대신, 혼자 폴란드에 남겠다고 선택했고, 지금은 이 길을 스스로 걷고 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가 내 눈을 한 번 살피며 물었다.


“당연하지. 앞으로 분명 넘어지고 힘든 날도 있겠지만, 이십 대의 좋은 점은 가볍다는 데 있는 것 같아. 가진 게 적으니까 잃을 것도 많지 않고, 그래서 더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시기지. 우리가 나중에 ‘실패’라고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는 사실 더 큰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연습일 때가 많아. 정말 아쉬운 건, 한 번도 도전해 보지 못한 것들이 아닐까?”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너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걷고 있어. 비록 너 자신은 아직 잘 모를지라도.”


스무 살에 카미노를 걷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내가 그 나이에 이런 길을 걸 기회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우리는 누구나 가 보지 않은 길, 살아 보지 않은 인생에 대해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을 품고 살아간다. 알렉산드라는 지금,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또 다른 스무 살을 살고 있다.


알렉산드라는 예술사를 전공한다. 옛 건축물을 보존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과 중국 미술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언젠가 일본 미술을 유럽에 소개하는 일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첫 번째 마을의 작은 바에 들러, 차와 토스트가 나오는 모닝 세트를 시켰다. 곧 파멜라도 도착했다. 그녀는 커피만 급히 마시고 먼저 떠났고, 나도 다시 혼자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걷는 시간이 길어지자, 오늘 들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되감기 시작했다. 프랑스로 떠난 부모님, 폴란드에 홀로 남겨진 열일곱 살의 알렉산드라, 아직까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마음의 매듭.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니, 나도 문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들을 하나씩 헤아리게 되었다.


다정했던 순간보다 다정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유난히 또렷이 떠오른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더 서툴러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유난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기를, 서로에게 너무 늦기 전에 더 솔직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길 위에서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오후가 깊어갈 무렵, 마침내 Villafranca del Bierzo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 26킬로미터는 예상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때 파멜라를 다시 만났다. 그녀도 지친 얼굴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보이지 않았다.


파멜라는 ‘parroquial’ 알베르게에 가고 싶어 했지만, 둘 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눈앞에 먼저 보이는 ‘Ave Fénix’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다. 그곳에는 아베도, 다이애나와 로리, 마틴 일행도 이미 와 있었다.


등록을 마치고 침대를 배정받는 중에, 알렉산드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이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와 파멜라는 아침 이후 변변한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배낭에 남아 있던 요구르트와 바게트를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두 사람과 함께 있자니, 정말 큰언니가 된 기분이었다. 둘 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대단해 보였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 파멜라와 알렉산드라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셋 다 허기져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렉산다는 “배고프면 말발굽도 먹을 수 있다”는 폴란드 속담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순례자 메뉴를 시켰고, 나는 샐러드를 거의 쓸어 담듯 먹어 치운 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부어 마셨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작은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이어갔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웃었다.


나는 축제 소리가 들리는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진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추고, 아이들은 폭죽을 쫓아다니며 웃고 있었다. 나만, 조금 쓸쓸했다. 하지만 이 쓸쓸함도 언젠가는 이 여정의 한 장면으로 고이 접히겠지.


알베르게 문 닫는 시간이 가까워져 마을 축제 구경을 뒤로하고 혼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였고, 작은 마을은 샘이 날 만큼 예뻤다.


스무 살의 알렉산드라가 이 길을 걸으며 부모에 대한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고,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 보려 하듯이, 나도 오늘 밤 이 마을에서 내가 걸어갈 다음 길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본다. 그러다 문득,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알렉산드라, 너는 무한한 가능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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