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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엽충의 소원

by 스튜던트 비

신은 스피리기나와 그의 친구들에게 ‘진화’라는 선물을 준 뒤로, 그들이 어떻게 변해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았다. 신의 눈에 비친 완족류와 물고기들은 하나같이 건방지기 짝이 없었고, 괘씸하게도 잘못을 인정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자도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싸우는 데만 몰두했으며, 신의 존재 따위는 애초에 잊어버린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낯설고도 간절한 울림에 신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그곳에는 삼엽충이 수많은 다리를 이용해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있었다.



신은 소원을 비는 생물이 한때 자신을 화나게 했던 스피리기나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절한 목소리를 신은 외면할 수 없었고, 마음을 바꾸어 삼엽충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대지를 가르는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고, 화염의 소용돌이 속에 마지막 남았던 삼엽충은 그렇게 멸종해 버렸다. 삼엽충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신은 처음으로 땅의 생물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 어떠한 하찮은 동물이라도 정말 간절한 소원 하나만큼은 꼭 들어주겠다고 동물들에게 약속해 주었다.



1) 삼엽충은 고생대 페름기 말 대멸종시에 사라졌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멸종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거대한 화산 활동과 그로 인한 온난화, 산소 부족, 산성비 등이 겹쳐 일어났다고 하며, 그 결과 전체 생물의 약 90%가 자취를 감추었다.


2) 동물 세계에는 세대를 넘어 전해 내려오는 격언이 하나 있다.

“동물이 소원을 빌 때는 신중해야 한다. 하늘은 당장이든,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든, 그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삼엽충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끝내 기록되지 않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동물들 사이에는 하나의 믿음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바로 간절히 빌어진 소원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다.


물론 지금의 동물들은 자신의 소원이 과연 이루어질지 의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가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잠시 외면당한 듯 느껴질 뿐, 신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차

신이 바빠서 일이 밀리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어떨 때에는 당장 소원을 들어주면 너무 티가 나기에, 적절한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경합

소원은 서로 경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신은 다수의 뜻을 따른다. 예를 들어, 세상의 멸망을 바라던 동물이 더 많았다면 신은 결국 그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물이 소원을 빌 때 신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형식 불비

동물들은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확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는 형식에 맞지 않는 요청이다. “잘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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