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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Mar 04. 2024

그래, 살아남길 잘했어

이지선 <꽤 괜찮은 해피엔딩>

책 속 청량한 문장들

사고 후 몇 달간, 겨우 세 시간 지속되는 진통제 세 대를 맞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을 때 사고 후 몇 달간, 겨우 세 시간 지속되는 진통제 세 대를 맞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을 때,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친구들과의 비교를, 아니 어떤 인간 존재와의 비교도 멈춰야 했다. 피부 이식을 받지 못한 얼굴에서는 하루종일 진물이 흘러나왔고 화상을 입은 피부가 땅겨져 7개월 동안 눈도 감기지 않았다. 이식한 피부마저 약해져 녹아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기막힌 상황을 남과 비교하거나 사고 이전의 나와 비교하기를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남과 비교하자면 나는 불행 중 최고로 불행한 사람이었고, 사고 전의 나와 비교하다 보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다가 분함이 치밀어 결국 더 불행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애당초 나는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비교하기를 멈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일들을 찾기로 해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살아남아서 가족과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이들과 비교하며 감사할 이유를 찾지 않았고, 남들과 비교하며 더 불행해지지도 않았다.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지금 누리는 오늘에서 감사할 일을 찾았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훨씬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잃은 것보다 내게 지금 남겨진 것에 감사하고, 남보다 못 가진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감사와 행복은 남과 비교해서 얻는 상대적인 것이어서는 안 됨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곳에서 얻어야 함을 배웠다. (…)

사고 후 나는 불행의 조건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주 행복을 느꼈다. 중환자실에서 처음 마신 물의 시원함을 기억한다.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일상에서도 ‘살아있다’는 행복을 찾은 덕분에 아주 자주, 또 길게 행복해할 수 있었다. (…) 지나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얻는 행복도, 불행도 차단해야 한다. 대단한 일을 성취하고 값비싼 것을 소유했을 때 느끼는 짧은 행복보다는 일상에서 자주, 길게 누리는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더 행복해지려면 그런 행복거리를 찾을 때마다 감사와 감탄을 표현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오, 멋져! 따뜻해! 시원해! 맛있어! 재밌어! 즐거워! 짜릿해! 포근해! 기분 좋아! 그래서 나 지금 감사해! 지금 행복해!”라고 말이다. 40-41



지금부터 상처 입은 당신께 나쁜 일은 생겼지만, 그것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상처와 트라우마는 동전의 양면처럼 스트레스와 동시에 좋은 것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비극적 낙관주의 Tragic Optimism를 설명하며 불행에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은 없지만, 불행으로부터  좋은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사고나 질병이나 괴로움이 잘된 일,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적어도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안에서 좋은 것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도 알게 되고, 가까운 사람에 데도 더 고마워하고, 괴로움을 겪는 타인에게 더 공감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감사하며, 인생의 우선순위가 변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외상 후 성장 Post-Traumatic Growth ’이라고 합니다. 239-240


어릴 적 나 혼자만 눈이 한쪽만 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두 눈의 시각차로 늘 두통약을 달고 살아야만 할 때, 유학 가서 묵게 된 하숙집에서 나랑 함께 사는 동생에게 사기를 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대에서 손을 다친 후 평생 해오던 첼로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전공을 바꿔 들어간 학교에서 인종차별을 당할 때, 당시에는 나쁜 일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스펙터클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다 부럽고, 나는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정말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도 없는 밤을 생각하고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2017년 여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일을 겪었다.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홀로 남겨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세 달쯤 울었을까, 바닥에 누워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이제 한 걸음을 다시 걸어야 했다.

가장 최악의 순간인 줄 알았는데, 우는 동안 내 등을 쓸어내리며 같이 울어준 친구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돌봤어야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들을 하고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혼자라 더 멀리, 더 깊이, 더 가벼이 결정할 수 있었다. 늘 중간에 끼어 누군가를 중재하기에 바빴는데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더 큰 곳, 더 멋진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홀로 새로 시작한 일에, 남겨진 사람들에 마음을 쏟게 되고 나니 관계가 더 나아지고 상황이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 눈보다 보이는 눈에 집중하고, 두 눈이 다 보이지 않게 된다 해도 어쩌면 그것이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갑작스럽게 당뇨병이 찾아왔을 때, 자꾸만 쓰러져서 검사를 해보니 메니에르병도 걸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이전에 겪었던 충격이 아니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거기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생긴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랄까, 내 안에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싹터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당뇨로 인해 몸무게를 관리하고, 식단을 철저히 지키게 되면서 몸도 맘도 맑아졌고, 메니에르병을 관리하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내기 시작했다.


눈이 한쪽만 보인다는 건 한 눈을 가리면 전맹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두 눈의 시각차로 늘 두통약을 달고 산다는 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사기를 당해보았다는 것은 너무 순진하게만 살며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고, 무대에서 손을 다친 후 평생 해오던 첼로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났기에 지금 다시 첼로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큰 기적으로 다가온다. 인종차별을 겪어 보았기에 지금 전공하며 만나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문화사회 한국을 상생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새롭게 나에 대해 인지하고 직면하며 그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이 시작되는 것. 견디어 낸, 혹은 견디고 있는 일들을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공유하며 하루를 더 살 힘을 나누는 것.

외상 후 성장은 어떤 대단한 일을 겪어내고 대단한 성장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향한, 내 인생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의 생각이 바뀌고 내 주변을 보는 시선이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모두는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향해 가고 있다. 정말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결국에는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를 더 잘 견디며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성장을 하며 걸어가는 서로가 서로를 부축할 때 더 괜찮은 해피엔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감당 못할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께는 우리 제발 살아만 있자고, 붙어만 있자고 부탁하고 싶다. 분명히 이 시간은 지나갈 것이기에.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각자에게 꼭 맞는 해피엔딩을 만나게 될 것이기에.


살아있다 보면 언젠가 "그래, 살아남길 잘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



[함께 보기]

인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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