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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무라면 Jul 09. 2019

[산책 7~9일]
하늘을 올려다보는 낭만이란

하루 20분 나는 한다.


   足 발 족

   발 (그냥) 발

   探 찾을 탐

   靜 고요할 정

   記 기록할 기.


   이름하여 ‘족발탐정기’.


   두 발로 걸으며 고요함을 찾는 산책의 기록.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의 연재 글입니다.







2019. 7. 7.()



   오늘은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이 일기는 거창하고도 웅장한 블록버스터 급 제목답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심연의 깊은 고요함과 드넓은 상상의 나래를 실컷 만끽하고자 했는데, 아내가 옆에 있으니 아무래도 매번 고독하게 혼자 산책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그네 같이 홀연히 떠나는 게 산책의 미덕 이건만, 어쩔 수 없지. 아내와 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네 발에 신겨진 두 쌍의 신발이 서로 교차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걸은지 5분도 채 안 돼, 아내의 직장 상사분을 마주쳤다. 그분이야말로 고독한 산책의 미학을 몸소 실천 중이셨다. 우리 둘 다 어색하게 인사를 드리고 지나치니, 그제야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휴~하고 내쉰다.



   날은 제법 선선했지만, 마트 앞에서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당겼다. 감정 휘몰아치는 굉장한 유혹이었다. 지금, 여기를 그냥 지나치면 평생 마음의 앙금이 남을까 싶어, 아내에게 마치 선심 쓰듯 거하게 쏜다고 말하고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구매했다. 나는 우아하고 교양 있고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며 글로벌해 보이는 월드콘, 아내는 촌스럽고 토속적이고 우락부락하며 칙칙한 와일드 바디. 바싹거리는 초코 테두리가 그리도 맛있다나 뭐라나. 맛을 좀 안다는 이들 사이에서 희대의 미식가로 알려진 그녀의 권위가 심히 의심된다.



   그러는 와중에 아까 뵀던 직장 상사님을 또다시 만났다. 손에 들린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 때문에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나, 또 한 번 멋쩍은 인사를 나눈다. 세 번째로 마주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역시 산책은 고독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산책한다,

   고로 고독하게 존재한다.



   일곱 번째 날이다.




2019. 7. 8.()



   AM 7:30. 아파트 현관을 나서며 화들짝 놀랐다.



   땅이 흠뻑 젖어있었다.

   비가 오나 싶어 손을 빼꼼 내밀어 봤는데, 살짝, 아주 아주 아주 살짝 비가 내린다(내린다는 표현조차 민망할 정도).



   그래서 1388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큰마음먹고 했던,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위화도 회군을 떠올리며, 족발러 회군을 거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호기로운 결심은 처참하게 무력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이유는 잠시 뒤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역사에 기록될 만한 2019년 족발러 회군은 이성계의 사불가론(四不可論)과 필적할만한 대의의 명분이 있을 때로 미루기로 하지.



   요 근래 들어, 산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만 같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난관을 맞아 손쉽게 포기했을 텐데. 잔비를 맞으면서도 기꺼이 산책을 하는 나를 바라보니, 그런 생각이 들며 새삼 대견하다. 산책에 최적화된 인간으로 빚어지고 있다. 어느 저명한 산악가는 이런 멋진 말을 남겼지.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길이 거기 있어 걸었다고.



   일곱 번째 날이다.

   가 아니라 여덟 번째다(일기장에 잘못 적었다).



   아, 산책길에 나서려는 순간, 강렬한 눈빛의 고양이 녀석을 봤다. 요염한 자태와 송곳 같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어, 족발러 회군을 거행하지 못했다고는 창피해서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겠군' 하는 망측한 생각을 하며 얼떨결에 걷게 되었다. 


   이상한 일기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이 점점 현실화되어가고 있다. 몹시 우려스럽다.




2019. 7. 9.()



   사람으로 태어나 참 다행이다 싶은 순간이 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 종종 그런 알 수 없는 촉촉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AM 7:10. 오늘도 힘찬 하루를 열기 위해 경쾌한 리듬의 걸음으로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는 그때, 젠장. 껌을 밟고야 말았다(어떤 자슥이 껌을 아무 데나. 확 그냥).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눈을 질끈 감으며, 아이 C’라는 후덕한 푸념을 내뱉느라 자연스럽게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 눈을 떠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이 나의 저속한 감탄사를 나무라듯, 너무나 멋지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청명한 가을 하늘 같이 말이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오직 사람만이 누리는 낭만이 아닐까. 한 치 앞도 못 보는 삶에 갇혀, 좁은 시야로 앞만 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텁텁하다. 이유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동물에 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혹시 있다면 알려 주셔요). 인간만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색과 감상, 그리고 고독과 낭만에 스스로를 적실 수 있다. 산책길 내내 여유롭게 하늘을 봤다.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돌에 발이 걸려 몸이 45˚ 갸우뚱하고 양손을 바둥바둥거리는 몸개그를 시전 하긴 했다. 하지만 나는 자타공인 고독한 사나이,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뻔뻔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눈동자에 한가득 머금는 하늘이, 알 수 없는 위안이 되었기에 대범하게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멋진 하늘 아래에 존재하는 나를 인식하니, 불현듯 찡하게 마음에 와 닿는 감정의 물기가 느껴졌다.



   껌을 밟지 않았다면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할 뻔했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고독과 낭만이 껌처럼 끈적하게 어우러진,

   아홉째 날이다.



   그런데 하늘을 보고자 고개를 계속 젖히고 있어서 그런지, 담에 걸린 것처럼 목과 어깨가 아프다. 역시나 인생이란 이처럼 정말 알 수 없다.


하늘을 자세히 보라. UFO가 비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베꼈다.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에는 몇몇의 작가님들께서 스스로에게 건 특별한 약속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매거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 )

Illustrated by 방울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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