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0분 나는 한다.
足 발 족
발 (그냥) 발
探 찾을 탐
靜 고요할 정
記 기록할 기.
이름하여 ‘족발탐정기’.
두 발로 걸으며 고요함을 찾는 산책의 기록.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의 연재 글입니다.
2019. 7. 10.(수) 흐림, 비
본 매거진의 대장님, 보름 작가님의 염려가 크신 것 같다. 월요일에 ‘족발러 회군’을 들먹이는 일기를 보시고는 ‘언젠가 족발러 회군을 하게 될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입니다’라는 차분하고도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기셨다.
덧붙어 ‘(이렇게 써놓으면 왠지 못하실 듯도 하고요ㅎㅎ)’라는 마음의 소리까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험 차원에서 이제부터 날씨를 적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비가 와락 쏟아지는 날에는 피치 못하게 산책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기에, 변명의 증거를 남겨보기로 하자. 아니라고 하기도 매우 힘들지만, 무책임한 인간이 되는 건 괜히 싫으니까. 또한 원래 일기에는 날씨를 남기는 게 통념이자 전통이기도 하니깐요(열심히 하겠습니다. 보름 작가님, 충성!).
AM 7:20. 오늘은 동네 골목길을 산책했다. 어디서나 볼법한 굽이굽이 좁은 길과 낮은 연립 주택,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빌라. 그 흔해 빠진 모습과 정돈되지 않은 담담한 생활의 풍경이 좋다.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내게는 한가로이 거니는 산책길이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묘했다. 특히나 하늘에 사선으로 걸린 전깃줄을 보니 더 그렇다.
열 번째 날이다.
그나저나 장마 기간에 온종일 비가 쏟아지면, 그날 산책은 어쩌나. 고민과 고독이 깊어지는 이슥한 밤이다.
2019. 7. 11.(목) 흐림, 비는 찔끔
산책의 장소로 대형서점을 고르는 이가 나 말고 있을까 싶다.
어젯밤 고독과 격정에 휩싸인 채 고민한 결과, 오늘의 산책 장소는 서점으로 정했다. 장마 기간이니, 날씨의 제약에서 벗어나 맥락 없이 걸어보자는 의도와 함께 오랜만에 새 책 냄새나 실컷 맡으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됐다.
AM 9:27, 오픈 3분 전. 이미 13명이나 되는, 책을 사랑하는 문화인들이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잠시 뒤, 왠지 모를 뿌듯함에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한 표정으로 회전문을 통과해 서점에 입성했다. 개장시간에 맞춰 롯데월드에 입장하는 기분이었다.
얼른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킁킁 냄새를 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여기에 온 제1의 목적은 산책이기에 한적한 서점을 휘저으며 걸어본다. 외국어 코너에서는 마치 내가 5개 국어에 능통한 이가 된 듯, 코믹 북 페스티벌 존에서는 마블의 히어로가 된 양, 음반가게에서는 백현의 City Lights 앨범을 5개쯤 사든 열성적인 소녀팬이 된 것처럼(실제로 대여섯 분이 계셨다), 경제경영서 앞에서는 글로벌 기업의 CEO가 된 마냥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가늠할 수 없는 맹랑한 아날로그의 맛이 있어 마음껏 상상하고, 꿈꾸고, 즐기고, 나뒹구는 공간. 언제나 서점은 내게 그런 곳이다.
산책을 멋지게 마무리하고자,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출간 3개월 만에 20만 부가 팔렸다는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 그것도 코코넛 일러스트가 제법 귀여운 바캉스 에디션. 두 시간 반 동안 책 한 권을 뚝딱 읽어버렸다.
오늘은 정신적인 산책까지 포함해 장장 세 시간을 걸었다(고 치자).
(언젠가 내 책도 여기에 진열될 수 있을까.)
열한 번째 날이다.
깜빡하고 킁킁 책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이제 와서 땅을 치고 싶은 진한 후회가 남는다.
* 김영하 작가님의 책은 처음 읽었는데, 꽤나 인상 깊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제자리에 고이 꽂아놨다. 20만 부나 팔렸으니, 나 하나쯤이야, 히힛. 그래도 이분의 책은 앞으로 더 읽어볼 것 같다.
2019. 7. 12.(금) 역시나 흐림, 안 더워서 다행
오늘은 노래 한 곡을 소개하려 한다.
가을 방학의 ‘속아도 꿈결’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벌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때.
어제 공교롭게도 멋진 책, 두 권의 맨 끝장을 덮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리고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AM 7:00. 이 에세이 책들의 글귀가 여전히 입맛에 남은 채로 싱그러운 아침 산책을 했다. 그 때문에 걸음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온전한 산책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때', 라는 가사에 마음과 걸음에 담긴다.
열두 번째 날이다.
*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中에서
**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中에서
* 마지막 일기는 [하루 20분 나는 한다] 매거진의 '핑핑이는 애용하고 울지', '석혜탁 칼럼니스트'작가님의 포맷을 섞어놓은 글이 되었네요. 두 분의 하루 20분 미션은 각각, 라틴음악 번역, 좋은 글 보관입니다. 영감을 주신 두 분의 작가님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에는 몇몇의 작가님들께서 스스로에게 건 특별한 약속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매거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 )
Illustrated by 방울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