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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무라면 Jul 18. 2019

[산책 16~18일]
산책의 정석은 슬리퍼

하루 20분 나는 한다.


   足 발 족

   발 (그냥) 발

   探 찾을 탐

   靜 고요할 정

   記 기록할 기.


   이름하여 ‘족발탐정기’.


   두 발로 걸으며 고요함을 찾는 산책의 기록.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의 연재 글입니다.







2019. 7. 16.(화)   흐림&비(소나기)



   어제 일기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다. 7월의 절반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7월은 31일까지 있었지, 어이쿠. 초등학교 때 천진난만하게 너무 놀아 재끼면 가끔 이런 기가 막힌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난 글에 일자를 잘못 기재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역시 살짝 맛이 가 있었구나(맙소사, 산책의 고수에 심취해 있어서).



   PM 12:30. 순댓국으로 고독한 혼밥을 하고, 역시나 오늘도 고독하게 걸었다. 뼛속까지 잿빛으로 물 들 것 같은, 계속되는 흐린 날을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사실은 매우 싫어하지. 그래도, 장마라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은 채 시적시적 산책하기로 했다. 아직까지 시들지 않은 선연한 장미 한 송이가 물감과 붓이 되어 단단한 잿빛 뼈를 채색해 주는 것 같았다.



   붉디붉은 빛깔을 보니 불현듯 또다시 아드레날린이 뿜어지고, 맥박의 속도가 빨라지고, 감정이 동요하며, ‘그래. 나는 고독한 산책의 고수, 고무라면이지’하는 괴이한 망상이 올라왔으나, 곧 마음의 평정심을 찾고 평범하게 걸었다. 오늘만큼은 무엇인가에 뇌를 조종당하지 않고 지극히 보편적인 산책을 하고 싶다.



   산책을 시작한 지 17분가량이 지났을 무렵, 갑자기 비가 와락 쏟아졌다. 매서운 소나기였다. 다행히 연구실 건물까지는 20m 남짓이었으므로, 잠시 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 나름 성실한 척하기 위해 20분을 꽉 채우려는 의도였다. 3분을 대기하고, 20분을 메우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유유하게 건물로 들어갔다. 날다람쥐 같은 민첩하고 재빠른 속도는 산책의 달인과는 통 거리가 있는 몸짓이다. 산책은 여유로워야 하니까.



   한 방울의 비라도 피하고자 후다닥 달려가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니,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러면 안 되지만 ‘내가 이겼다!’는 도취감에 잠시 빠졌다(후훗).



   열여섯 번째 날이다.

   그런데, 밤에 일기를 쓰고 있으니 비 맞은 내 고운 머릿결이 심히 염려된다. 고작 이거 가지고 탈모가 오지는 않겠지(제발).





2019. 7. 17.(수)   흐림, 때때로 소나기



   PM 11:40. 하루 20분을 지키기 위한 시대적 사명감으로, 허겁지겁 늦은 밤에 산책을 떠났다.



   그리고 이 일기는 다음 날 아침에 허겁지겁 쓰고 있다.



   고요한 한밤의 정취보다도 내 관심을 끌어당긴 건 한쌍의 낡은 슬리퍼였다. 산책에는 역시 산뜻한 슬리퍼가 제격이다. ‘족발탐정기’ 연재 중에, 나의 발 건강을 위해 운동화를 신고 산책을 하시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소신(고집) 있고, 제 갈 길 가는 고독한 산책의 고수. 내게는 슬리퍼가 딱이다.



   운동화를 신고, 신발 끈을 질끈 묶으면 뭔가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진다. 신발을 신는 그 순간부터 벌써 기진맥진하다. 마치 진지한 표정으로 준비운동과 스트레칭을 하고, 화려한 출발점에 서서 42.195km의 마라톤을 뛰어야 할 것 같은 심정이랄까. 그런 비장함은 산책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슬리퍼가 산책에 적격인 이유는 부담이 없어서이다. 신발장에 제멋대로 나뒹구는 슬리퍼에 발만 쏙 끼면, 산책 준비는 끝. 발걸음도, 마음도 가볍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홀연히 떠날 수 있다.



   어쩌면 삶도 그렇다. 큰 맘먹고 몸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무겁게 살아가기보다, 그저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소소하고 가볍게 지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가벼움이 역설적으로 삶에 힘을 불어넣는다. 내게 산책은. 이토록 평범하게 힘을 빼는 산뜻한 몸짓이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가 항상 긴장한 채로 ‘열심히’만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때론 부담 없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야 할 때가 있다.



   ‘힘 빼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슬리퍼는 내 몸의 쓸데없는 긴장을 풀어주는 신비한 도구다. 그리고 산책은 방전된 나를 충전하는 시간이고.



   열일곱 번째 날이다.



* ‘힘 빼기’ 아이디어는 ‘힘 빼기의 기술’이란 책에서 영감을 얻았습니다.

   - 힘 빼기의 기술(김하나 저/ 시공사 / 2017.7.28.)

다리가 길어보이쥬?ㅎㅎㅎ


2019. 7. 18.(목)  아직까지는 흐리기만



   막내(우리 집 강아지)로부터 2차 습격을 당했다.



   AM 6:20.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니 막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침대 위로 점프. 똬리를 틀고야 말았다. 이 방해꾼 녀석을 가차 없이 뿌리치고 고독한 산책길을 나서야 했건만, 이내 포기해버렸다. 이놈의 댕댕이! 형의 산책을 방해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에서 태평하게 누워 혀를 낼름낼름 거리고 있다. 댕댕이들은 귀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나 제멋대로다. 나만큼이나 뻔뻔한 녀석이다. 어쩌면 더할지도.



   PM 4:30.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이런 길이 없었는데, 새삼 세월이 훌쩍 흘렀음을 깨닫는다. 길을 걷는 이들도 많았고, 새초롬히 얼굴을 내민 꽃들도 아름다웠다. 딱히 별 특별한 일 없는 평범하고 한적한 산책이었다. 보편적인 평범함. 이 역시 산책이 발산하는 고유한 향기 중 하나다.



   조만간 막내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야겠다. 댕댕이들은 언제나 산책에 환장하지.

   독자님들, 심쿵 주의!



   열여덟 번째 날이다.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에는 몇몇의 작가님들께서 스스로에게 건 특별한 약속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매거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 )

Illustrated by 방울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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