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무라면 Jul 15. 2019

[산책 13~15일]
산책의 고수

하루 20분 나는 한다.


   足 발 족

   발 (그냥) 발

   探 찾을 탐

   靜 고요할 정

   記 기록할 기.


   이름하여 ‘족발탐정기’.


   두 발로 걸으며 고요함을 찾는 산책의 기록.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의 연재 글입니다.







2019. 7. 13.(토)   맑음과 흐림 사이



   산책의 장소로 서점을 택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고 한다. 심지어 코스트코(Costco)에서 산책하시는 분도 계시다고(꽃뜰 작가님이라고 합니다!ㅋㅋㅋ). 그렇다면 재래시장을 휘저으며 산책하는 건, 그다지 유별난 일은 아닐 것이다.



   가족모임 때문에 아내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내가 자란 동네의 시장 안에 위치한 한 작은 국숫집에서 한 끼 소박한 점심을 먹었다. 깊고 얼큰한 국물의 잔치국수, 그 정갈한 한 그릇에 심장서부터 손끝까지 따뜻해짐을 느낀다. 이 집만큼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국수가 먹고 싶어, 찾아갔는데 사라져 있다면 상실감이 굉장히 클 것 같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국물이 가히 환상적이다. 아내도 황홀한 맛에 취해 한껏 들이켰다.



   북적북적함 속에 구수한 질서가 있는 곳. 시장은 옛날부터 그렇게 자리를 지켜왔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거닐었던 재래시장의 모습은 그때와 비슷한 듯 다르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현재 내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20여 년 전 한 아이의 호기심이 묵은 때와 같이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그 잔상이 아련한 환상처럼 내 머리와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 내 옆에서 걷는 아내는 때 묻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겠지(메롱).



   열세 번째 날이다.


아내의 드링킹 국물
이빨을 내놓고 발라당 낮잠을 주무시는 냥이


2019. 7. 14.(일)   흐림



   가만있기는 싫다. 멈추지도 않는다. 그치만 귀찮음은 질색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하나가 있다. 그냥 걷는 것. 발동작은 유려하다. 허나 걸음이 느리진 아니하다. 그 와중에도 서슬 퍼렇게 주변을 살핀다. 내키면 한동안 제자리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본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뒷짐을 지며, 시선은 주로 하늘로 향한다. 정해진 목적지도, 주어진 임무도, 맞춰야 할 속도도, 소속된 집단도 없다. 주변의 수상한 눈초리와 수군거림은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하루에 딱 20분 떠도는 것. 정처 없이 방랑할 운명이다. 그는 고독한 산책의 고수, 고무라면이다.



   AM 5:20. 고독한 산책의 고수는 또다시 홀연히 길을 떠난다. 지난밤 그를 괴롭히던 세 마리의 모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원래 방랑할 운명이니까. 한 마리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나머지 둘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산책의 고수는 미련 없이 길을 나서야 한다. 저 멀리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 고독한 여정에 제법 잘 어울린다. 짙은 안개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든 꽃밭에 자리를 튼 고양이가 반갑다고 야옹하지만, 그는 시크한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무심하게 지나친다. 그가 바라는 거는 오직 하나, 정처 없 떠나는 방랑.



   흑역사로 남는 것 따윈 두렵지 않다.



   나는야,

   고독하면서도 패기 있는

   산책의 고수, 고무라면.



   열네 번째 날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 글은 이상한 일기의 정수로 영원히 박제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젠장!).





2019. 7. 15.(월)   흐림, 오후 비



   어제는 잠시 맛탱이가 갔음이 분명하다.

   이게 다 내 피를 잔뜩 빨아먹은 악랄한 모기 삼총사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다시 평소대로 맑고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왔다.



   AM 10:30. 오랜만에 학교 교정을 걸었다(깜짝 놀라셨겠지만, 저는 대학원 생이랍니다. 호호). 흐리고 꿉꿉한 날씨가 계속되는 바람에, 기분은 영 신통치 않지만 그래도 걸어본다. 나무와 꽃들은 제철에 맞게 본연의 색을 뿜고 있고, 나는 이를 감상하며 고즈넉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상한 피가 심장에서 솟구치는 느낌이다. 낯선 호르몬도 분비되는 것만 같다.

   느닷없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고독한 산책의 고수, 고무라면이다.

   부인하기 점점 힘들다. 운명이 그렇게 정했다.



   그냥 이상한 일기가 컨셉이 되어버린 것 같다.

   정말 컨셉뿐일까 하는 의문이, 나조차도 든다는 게 문제지만.



   열다섯 번째 날이다. 벌써 7월의 반이 지났다.









'[공동매거진] 하루 20분 나는 한다.'에는 몇몇의 작가님들께서 스스로에게 건 특별한 약속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매거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 )

Illustrated by 방울 작가님


이전 05화 [산책 10~12일]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가는 순간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