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사투
요즘 오타쿠의 삶을 살고 있다.
하루 종일 내 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소리만 들리자, 동생이 문 열고 직접 한 소리다.
"이제 오타쿠의 삶을 살기로 한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일어 마스터라도 하면 좋으련만, 하루 종일 일어를 들어도 아는 단어라곤 '멘도쿠사이'나 '나루호도', '신조사사게요', '이쿠죠' 같은 단어뿐...
마음먹었던 일도 잘 안 됐고, 이제 정말 결정을 해야 할 때라 불안하기만 하다. 왜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 얻는 걸 포기하고 고립되어 가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걔들은 젊기라도 하지.
뭐가 됐든 내가 하고 싶어야 하는 성격이니 어쩌겠나. 그저 나의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나를 위한 카레를 만들기로 한다. 가장 만들기 쉬운 음식 중 하나지만 귀찮아서 해 먹지 않는 음식이 카레다. 야채 썰고 볶고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너무너무 귀찮다.(요리 잘하는 사람 중에 게으른 사람 찾기도 힘들 듯) 그런데 나는 카레를 좋아한다. 그래서 누군가 해주지 않으면 좋아하는 만큼 못 먹는 음식이 카레다.
재료 : 감자 3개, 양파 1개, 당근 반 개, 돼지고기 안심, 오뚜기 카레
엄마표 카레는 우선 야채 크기가 굉장히 작고 일정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약간 크게 써는 걸 더 좋아한다. 사실 야채 써는 방법도 잘 몰라서 내 맘대로 썬다. 당연히 일정하지 않다. 감자 썰어 놓은 것 좀 보게.
냉동실에 얼린 돼지고기 안심을 상온에서 녹인 뒤 대충 잘라준다. 우리 집 식구들은 고기 비계를 싫어한다. 삼겹살은 먹지만 비계의 물렁한 느낌을 싫어해서 밖에 나가선 제육볶음도 잘 안 먹는다.
기름을 두르고 고기를 볶다가 감자를 넣어준다.
감자를 한 번 숨이 익을 정도로 볶은 후 당근도 넣어주고
그다음에 양파도 같이 넣어서 후루룩 한 번 볶아준다. 다 익힐 필요는 없다. 그냥 숨 한 번씩 죽을 정도로만 볶아낸다.
왜냐면 어차피 물 붓고 익힐 거거든. 대충 물을 550ml 정도 부었던 거 같은데... 약간 더 부어도 좋았을 듯. 물 조절에 따라 간이 싱거운지 짠지 결정되기 때문에 잘 맞춰야 하지만 사실 난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대충 붓는다.
뚜껑을 덮어서 푹 익힌다. 이것도 대략 5분에서 10분 사이 정도 익힌 것 같다.
카레는 약간 매운맛. 내 입맛엔 매운맛도 좋을 것 같지만 식구들은 매운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이 끓으면 카레 가루를 넣어주고
역시 뚜껑을 덮고 푹 익혀준다. 이때는 5분 정도 있다가 불 껐던 것 같다. 그냥 잘 모르겠으면 감자 하나 꺼내서 먹어보면 된다. 야채가 익었으면 불 끄고 먹어도 되니까.
밥에 비해 카레를 굉장히 많이 먹는 편이라 밥보다 카레를 듬뿍 넣어 준다. 와- 감자 크기 자기주장하는 것 좀 봐. 이날 카레는 약간 짰다. 그래도 맛있었다. 이렇게 해두면 하루 정도는 카레만 먹는 것 같다. 카레를 며칠 놔뒀다가 먹으면 더 맛있다는데 그럴 정도로 카레를 놔둔 적이 거의 없다.
카레와 김밥의 문제점은 집에서 해 먹으면 한도 끝도 없이 많이 먹는다는 거다. 카레 할 때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는다. 김밥 역시 마찬가지다. 집에서 해 먹는 김밥은 왜 2줄, 3줄이 막 들어가는 거지? 먹고 나서 항상 배가 터져 죽을 것 같다. 만성 위염에 시달리는 나는 항상 후회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서 먹는 걸 오래 놔뒀다가 먹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들 먹보들만 살아서 그런가. 암튼 이날의 카레는 나를 위로해 줬다. 잘 될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래서 싹싹 비워 해치웠다.
★★★★☆
카레를 맛없게 하기도 쉽진 않지.
카레 가루가 다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