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조금만 견디ㅈ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다 '이거 데자뷔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보내던 메시지를 지웠다.
며칠 전부터 주고받은 내용을 보니 나는 '견디자'는 말을 너무 자주 사용했다.
다른 친구와 연인에게 보냈던 메신저에도 그 단어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같은 말을 너무 반복해서 데자뷔처럼 느껴졌었나 보다.
'왜 이렇게 자주 쓸까?'
이유와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나는 늘 그렇듯 스스로 되물어보았다.
'견뎌야 하는 일들이 많았으니까.'
즉문즉답.
불과 1초 만에 떠올랐다.
그래서 더 안쓰러운 답변이었다.
'견디자'는 말은 나의 불우했던 과거.
수없이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 기간이면 누군가 상습적으로 교과서를 훔쳐갔었다.
사회 초년생 때, 차비가 없어 2시간가량 걸어서 출퇴근하기도 했다.
외풍이 너무 심한 단칸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잔 적도 있다.
어떤 직장에서는 자기 분에 못 이겨 팀원에게 욕하는 상사를 매일 봐야 했다.
원하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했으나 쓰디쓴 상실감만 맛봤다.
때로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나는 항상 '견디자'라고 위로했다.
지금은 삶이 안정 궤도에 올랐지만 과거의 입버릇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월요일에는 '휴, 금요일까지만 견디자.'
목요일에는 '그래, 하루만 더 견디자.'
텅장을 볼 때면 '헐, 월급날까지만 견디자.'
유산소 운동을 하면서 '아, 딱 30분만 견디자.'
업무량이 과도하면 '이 프로젝트만 견디자.'
누군가 힘들어하면 '우리 조금만 더 견디자.'
'견디다'의 사전적 정의는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면서 살아나가는 상태'이다.
유사어로는 '버티다, 참다, 인내하다, 이겨내다, 힘내다'가 있다.
어려움을 잘 견뎌낸 사람이나 생물을 보면 참 강인하다거나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그건 견뎌낸 이후가 아닌가.
견디는 과정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엄청난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상태.
부정적인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희생적이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이나 자신이 뱉은 말은 온 우주를 돌아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데.
오랫동안 '견디자'를 반복하며 고통스러운 상황에 집중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그동안 뱉었던 무수한 '견디자'가 나를 견디는 삶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그 순간 그 말을 멀리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견디는 삶은 싫다.
버티고 싶지 않고, 참고 인내하고 싶지 않다.
이겨내고 싶지도, 힘내고 싶지도 않다.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더 이상 무력한 존재, 수동적 존재로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대신 다른 말을 많이 쓰고 싶어졌다.
대안을 찾자.
유연하게 대처하자.
웃으며 즐겨보자.
적극적으로 방어하자.
단호하게 거절하자.
때로는 도망치고 물러서자.
진정으로 내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실제로 지금은 하루하루 행복하니까.
이젠 '견디자' 금지를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