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진 행복
전. 부침개 또는 지짐이라고 부르는 한국 요리. 주로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에 많이 먹는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막걸리 한잔과 함께 생각나기도 한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고소한 기름 냄새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명절 때는 전을 부치는 일이 고된 노동이 되지만 그래도 전이 없으면 왠지 명절이 허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Korean style pancake'로 불린다. 팬케이크라고 하면 달달한 디저트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프랑스 요리의 크레이프나 네덜란드 요리의 파넨쿠크, 러시아 요리의 블린처럼 식사용으로 먹을 수 있는 팬케이크가 있다. 애초에 유럽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밀가루나 메밀가루에 물을 많이 넣고 묽게 부쳐먹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도 묽은 반죽을 부친다는 개념에서 보면 팬케이크와 비슷한 면이 있긴 하다.
명절에 왜 전을 부칠까?
명절 음식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필 명절에 전을 부치고, 또 그렇게 상에 올리게 되었을까?
전이라는 음식의 기원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지금은 흔히 집에서 해 먹지만, 본래 전은 민가에서 일상적으로 즐기던 음식이 아니었다. 기름이 귀하던 시절, 넉넉히 기름을 두르고 재료를 부쳐내는 전은 값비싼 궁중 음식에 가까웠다.
당시에는 밀가루가 귀해 전분을 쓰거나 계란을 풀어 반죽처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밀가루 반죽의 바삭한 전과는 모양과 식감이 크게 달랐을 것이다. 쉽게 말해, 서민들이 아무 때나 접하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은 평상시보다는 특별한 순간에만 등장했다. 명절이나 혼례, 환갑과 같은 큰 잔칫날, 혹은 제사상에 오르는 제물로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전은 단순히 먹는 음식이 아니라 ‘축하’와 ‘정성’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기름 냄새가 가득 번지며 집안이 북적이는 풍경은 그 자체로 명절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고, 가족들이 모여 부치는 과정 또한 하나의 의례처럼 자리 잡았다.
전이 지금처럼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이후라고 본다. 6·25 전쟁 직후, 미군을 통해 밀가루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음식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는 귀했던 밀가루가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전은 점차 집집마다 해 먹는 음식이 되었고, 명절에 빠질 수 없는 전통 음식으로 굳어졌다.
전의 종류
우리가 가장 많이 먹게 되는 전이 아마 김치전이나 파전일 것이다. 그렇지만 전은 생각보다 종류가 엄청 많다. 재료를 넣는 대로 뚝딱 완성이 되기 때문에 웬만한 재료로는 전을 만들 수 있다.
집에서도 만들어먹기 좋으니 변형된 모습으로 만들기도 한다. 반죽에 카레가루를 넣어 카레전을 만드는 등 정말 생각지도 못한 재료로 전을 부치기도 한다.
우리가 평소 가장 쉽게 접하는 전은 아마 김치전이나 파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전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 전의 가장 큰 매력은 ‘재료의 자유로움’이다. 특별한 재료가 없어도, 그저 집에 있는 재료 몇 가지면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음식이 전이다.
잘 익은 김치만 있으면 되는 김치전(김치는 정말 빠지는 데가 없다), 파전, 굴전, 녹두전, 호박전, 감자전, 육전 등 해산물이나 고기, 야채 등 재료가 뭐든 간에 맛없는 전을 찾기 힘들다.
또한 전은 집에서 변형하기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 기본 반죽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주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김치+참치=김치참치전이나 호박+감자=호박감자전처럼 두 가지 이상을 콜라보할 수 있다. 나아가 반죽에 카레 가루를 살짝 섞어 이국적인 풍미의 카레전을 만들거나, 치즈를 넣어 고소한 치즈전을 만들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땡기는 이유
비 오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막걸리에 파전, 혹은 빈대떡을 떠올린다. ‘비 오는 날 = 전과 막걸리’라는 공식은 이제 하나의 문화적 코드처럼 자리 잡았다. 실제로도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한 편의점 조사에 따르면 장마철 비가 오는 날의 막걸리 판매량은 맑은 날과 비교했을 때 무려 43.4%나 증가했다고 한다. 단순히 체감적인 느낌이 아니라 실제 소비 패턴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전 종류의 판매량도 큰 폭으로 증가한다. 같은 조사에서 동그랑땡이나 부침개류의 판매량은 비가 오지 않던 주보다 무려 169%나 치솟았다고 하니, ‘비 오는 날 전이 땡긴다’는 이야기가 그냥 근거 없는 속설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 오는 날 전이 생각나는 걸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재미있는 추측이 존재한다.
1. 비가 오면 습도가 높아지고 냄새가 잘 퍼지면서 냄새에 이끌린다는 썰
2. 비 오는 날 일조량이 낮아지면서 기분이 울적해지고 혈당이 떨어진다. 이를 올려주는 것이 밀가루 음식이다 보니 몸이 땡긴다는 썰.
3. 비 오는 소리가 전을 기름에 부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썰
뭐가 됐던 날씨는 그냥 먹기 위해서 만들어낸 핑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날씨라는 특별한 분위기가 그저 핑계가 되어, 따끈한 전 한 장과 막걸리 한 사발을 합리화시켜준다. 이 단순하고도 즐거운 핑계가 비 오는 날 전이 주는 특별한 매력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