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비빔밥
다이어트를 할 때 꼭 떠올리는 음식 하면 단연 샐러드다. 신선한 채소를 가득 담고 거기에 닭가슴살이나 계란, 두부, 콩 같은 단백질류를 넣어서 영양과 칼로리를 만족시키는 음식이다. 약간의 탄수화물로 고구마나 감자 등을 곁들이기도 한다.
신선한 샐러드는 맛과 영양면에서 훌륭하지만 어쩐지 뒤돌아 서면 금방 허기가 느껴져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든다. 나는 샐러드의 이런 부족함을 채워주는 게 포케가 아닐까 생각한다. 샐러드와 비슷하지만 밥이나 면과 곁들여 훨씬 더 든든한 포만감을 안겨준다.
포케 전문점이 생긴 지 그렇게 오래된 거 같지 않지만 생각보다 꽤 역사가 긴 음식이다. 포케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생활 속 음식에서 시작됐다. 하와이 말로 ‘poke’는 ‘썰다’, ‘자르다’라는 뜻이다. 즉, 포케는 ‘썰어놓은 생선’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름을 가진 음식이다. 하와이 사람들은 예로부터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바로 손질해 소금, 해초, 마카다미아 너트 등으로 간단히 무쳐 먹곤 했다. 냉장고도, 복잡한 조리도 필요 없던 시절의 지혜로운 한 끼였다.
19세기 후반, 하와이는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다문화의 섬이 되었다. 특히 일본과 중국, 필리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포케에 새로운 맛을 더했다. 일본인들은 간장과 참기름, 파, 양파 같은 양념을 가져왔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간장 베이스의 포케 소스로 발전했다. 이 시기부터 포케는 단순한 생선무침을 넘어 섬 문화와 이민 문화가 뒤섞인 요리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 포케는 하와이 전역에서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슈퍼마켓이나 주유소에서도 포케를 담은 작은 용기를 살 수 있었고, ‘포케 볼(poke bowl)’이라는 이름으로 밥 위에 올려 먹는 형태가 등장했다. 하와이 주민들에게 포케는 집밥이자 간식, 술안주이자 도시락이었다.
이 음식이 본격적으로 세계로 퍼져나간 건 2010년대 초반, 건강식 트렌드가 확산되면서부터다.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안 포케’라는 이름으로 체인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샐러드와 스시의 중간쯤 되는 새로운 개념의 한 끼로 주목받았다. ‘커스터마이즈(맞춤식)’ 문화와도 잘 어울렸다. 원하는 밥, 소스, 토핑을 직접 고를 수 있었고, 포케 볼은 자연스럽게 패스트푸드의 대안이 되었다.
한국에 포케가 들어온 건 2015년 무렵이다. 처음엔 “연어 덮밥과 뭐가 다르지?” 하는 반응이 많았지만, 곧 깔끔한 이미지와 SNS 친화적인 비주얼 덕분에 인기를 얻었다. 특히 ‘건강한 한 끼’, ‘다이어트용 식사’, ‘가벼운 점심’이라는 키워드와 맞물리면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지금은 포케 전문점이 골목마다 있을 정도로 흔해졌고, 연어 외에도 참치, 새우, 심지어 두부나 닭가슴살을 이용한 퓨전 포케도 등장했다.
하지만 정작 하와이 현지의 포케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밥 위에 올리기보다는 생선 자체의 맛을 즐긴다. 하와이 마트에 가면 간장, 고추, 마요네즈, 리무(해초) 등 다양한 양념으로 버무린 포케가 용기에 담겨 진열되어 있고, 현지인들은 그것을 그냥 포크로 집어 먹는다. ‘포케 볼’은 사실 하와이의 전통이라기보다, 현대의 식문화 속에서 재탄생한 글로벌 버전의 포케인 셈이다.
포케는 흥미롭게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와이에서는 바다의 신선함을 담은 전통 음식이지만, 미국 본토에서는 건강한 도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깔끔하고 예쁜 한 끼로 변주되었다. 문화가 이동할 때 음식은 이렇게 다른 색을 입는다. 그 변화 속에서도 포케의 중심에는 늘 ‘바다’, 그리고 ‘썰어놓은 생선’이라는 단순한 본질이 있다.
샐러드가 몸을 가볍게 한다면, 포케는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균형, 신선한 재료의 조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 결국 포케의 본질은 단순하다. 신선한 재료를 정직하게 썰어내고, 자연 그대로의 맛을 즐기는 것. 그 단순함이야말로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근원적인 미식의 형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