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퓨전요리
명절이나 잔칫날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잡채다. 탱글탱글한 당면과 알록달록한 채소, 고기가 어우러진 단짠 양념의 맛은 ‘한 입만’으로는 절대 멈출 수 없다. 잡채는 식탁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없으면 허전한 음식이다. 특히 엄마가 큰 대야에 재료를 넣고 조물조물 섞을 때, 옆에서 젓가락으로 한 입 얻어먹는 순간의 맛은 어떤 고급 음식도 따라올 수 없다.
예전엔 채소가 많이 들어가서 건강식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당면이 나쁜 탄수화물’이라는 이유로 다소 미움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잡채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지만, 특별한 날엔 그만큼 정성이 담긴 음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잡채가 없는 명절 상은 완성되지 않은 듯하다.
광해군 최애 음식
잡채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로 간다. 조선시대 초기 궁중의 잡채에는 당면이 없었다. 지금처럼 면이 중심이 아니라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를 함께 볶아 만든 ‘채소볶음’에 가까운 요리였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다양한 육류에 버섯, 미나리, 숙주, 당근 같은 채소를 더해 계절에 맞게 만들었다. 오방색(청·적·황·백·흑)을 갖춘 재료를 사용해 색감이 화려했고, 식감의 조화도 훌륭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광해군과 잡채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광해군은 잡채를 유독 좋아했는데, 그의 총애를 받던 관리 이충이 바로 이 요리 덕분에 유명해졌다. 그는 왕이 좋아하는 잡채를 자주 바치기 위해 한겨울에도 지하에 온실을 만들어 채소를 길렀다. 이렇게 정성껏 만든 반찬을 올려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덕에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잡채 판서’라 부르며 비꼬았지만, 반찬 하나로 왕의 총애를 얻은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온다. 음식 하나가 신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셈이다.
언제 당면이 들어갔나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당면 잡채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잡채가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1919년 무렵이다. 당시 황해도 사리원에 당면 공장이 세워지면서 당면이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출간된 『조선요리제법』에서 처음으로 당면 잡채 조리법이 등장하며, 이후 신문 기사와 요리책을 통해 널리 퍼졌다. 당면이 만두나 순대에 들어가게 된 시기와도 비슷하다.
초기의 잡채는 간을 하지 않고, 따로 마련된 간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당면이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당면 특유의 텁텁함과 윤기를 살리기 위해 간장, 소금, 참기름 등으로 직접 간을 하고 무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아는 달콤 짭짤한 ‘단짠 잡채’가 완성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당면이 들어가지 않은 전통 형태의 잡채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전주 콩나물잡채다. 면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전북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밥반찬으로 사랑받아온 음식이다. 지역에 따라 같은 이름이라도 전혀 다른 형태로 전승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려우면서 쉬운 요리
잡채는 ‘쉬운 듯 어렵고, 간단한 듯 복잡한 음식’으로 유명하다. 일단 들어가는 재료부터가 피곤하다. 기본적으로 당근, 양파, 시금치, 버섯, 고기가 들어가며, 여기에 있으면 더 좋은 재료(목이버섯, 부추, 피망 등)가 더해진다.
문제는 각 재료가 익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채소마다 따로 볶아야 색감이 살아나고, 식감이 뭉개지지 않는다. 그래서 ‘잡채를 만든다’는 건 결국 재료 하나하나를 따로 손질하고 볶은 뒤, 마지막에 간을 맞춰 섞는 일이다.
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도, 우리는 잡채를 대개 반찬으로 먹는다. 메인 요리로 올려도 될 만큼 공이 들어가지만, 밥상에서는 항상 곁가지로 자리한다. 어쩌면 그래서 더 특별한지도 모른다. 정성과 시간을 들여 만든 음식이기에 명절이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날에만 등장하고, 그만큼 기다림의 가치가 있는 맛이다.
요즘은 다행히 잡채를 조금 더 쉽게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이 생겼다. 여러 재료가 손질되어 나오는 밀키트, 혹은 팬 하나로 순서대로 볶아 만드는 원팬 잡채 레시피 덕분이다. 맛은 조금 다르지만, 정성의 의미를 잃지 않고도 손쉽게 그 풍미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엄마의 손맛으로 버무린 따뜻한 잡채 한 접시만큼은 어떤 밀키트도 따라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