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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 붕어빵, 호떡 겨울 간식 배틀

가슴속 3천 원이 울고 있다

by 채널김

겨울이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추위? 그까짓 거 꽁꽁 싸매고 돌아다니면 견딜만하다. 하지만 어디선가 솔솔 풍겨오는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는 참기 힘들다. 방금 밥을 먹고 나왔어도 붕어빵 하나 들어갈 자리는 꼭 생겨나기 마련.


간식을 먹으려고 일부러 겨울이 되면 현금을 챙겨 다니는 나로서는 시즌에만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이 너무 반갑다. 따뜻한 날씨일 땐 하나도 생각이 안 나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꼭 생각이 난다.





붕어빵을 찾아서

붕어빵은 방심하고 다니는 순간 갑자기 보이는 경우가 많다. 굳이 내가 붕어빵을 찾아 먹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눈에 보이면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정말 먹고 싶어서 찾으면 또 안 보인다. 그래서 요즘은 붕어빵 앱으로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세상 좋아졌다)


붕어빵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타이야키가 원전이라고 본다. 우리의 붕어빵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크기가 크고 식감이 뻑뻑하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현지화되었는데 좀 더 고소하고 바삭한 반죽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붕어빵으로 자리 잡았다.


붕어빵의 근본은 팥붕어빵이지만 요즘은 슈크림파가 많이 치고 올라왔다. 그래서 어딜 가나 꼭 저 두 종류는 팔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붕어빵 전문점들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별별 종류가 많다. 한 끼 식사가 될 법한 피자 붕어빵부터 고구마, 치즈, 초코크림, 콘치즈 등 붕어빵 뷔페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격이 저렴하지 않아 졌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저렴한 맛에 먹던 붕어빵이 요즘엔 기본 붕어빵만 해도 2개 천 원, 혹은 3마리 2천 원에 판매되고 있다. 게다가 재료가 다양해진 고급 붕어빵은 개당 3천 원 ~ 4천 원은 기본이다. 이쯤 되면 천 원짜리 간식은 옛날말이긴 하다. 솔직히 붕어빵 2개는 누구 코에 붙일까 싶기도 하고 천 원에 5개 팔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호떡집엔 왜 불이 났나

호떡집 기름냄새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 고소한 기름냄새는 언제부터 중독된 건지 모르겠다. 집집마다 맛이 다 달라서 여기저기 하나씩 맛보다 보면 겨울이 훌쩍 지나간다. 겨울만 되면 호떡 때문에 찌는 살은 슬프지만 내 혓바닥은 늘 감동하기 때문에 괜찮다.


호떡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음식인 줄 알았는데 호떡의 호가 '오랑캐 호(胡)'라는 설이 있다. 옛날 서역(과거 중앙아시아, 인도, 아랍지역)에서 먹었던 음식이었다는 얘기다. 서역과 왕래를 하면서 중국 북부에서는 제법 흔하데 먹었었는데 지금의 달달한 맛보다는 고기나 야채를 넣어 한 끼 식사로 먹었다. 지금의 몽골에서도 호떡과 비슷하게 생긴 음식을 먹는다.


“호떡집에 불났다.”

호떡 하면 이 말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이 말은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또는‘가게에 사람이 너무 많아 장사가 잘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말 그대로 과거 호떡집들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고, 그 활기찬 풍경이 오늘날까지 속담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1900년대 초, 한반도에서는 밀가루와 설탕이 귀했다.

제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사탕수수 재배도 어려운 기후 탓이었다. 이때 화교 상인들이 중국에서 밀가루와 설탕을 들여와 팔기 시작하면서, ‘호떡’은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고급 간식이 되었다. 노동 현장 근처에 세운 중국인 노점에서 호떡이 구워지면, 그 향기와 달콤한 맛에 조선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국밥 한 그릇이 15전, 20전 하던 시절에 호떡 한 장이 5 전이나 했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호떡 노점은 기름을 많이 써서 불이 자주 났다.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사이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고, 중국인 노점에 불이 나면 조선인들은 “호떡집에 불났다”는 소식에 그저 구경꾼이 되어 불구경을 했다.

불길 속에서 떠드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조선인들에게 “시끄럽고 어수선한 풍경”으로 각인되었고, 그게 바로 오늘날 속담의 어원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1930년대의 호떡 붐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자취를 감췄다.

그 후, 미국의 밀가루·설탕 원조가 들어오면서 한국인은 복잡한 화교식 레시피 대신 단순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한국식 호떡’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호떡은 이렇게 태어난 로컬라이징 버전이다.

참고로,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피코크 계피호떡이 당시의 화교식 호떡 레시피와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한다. 겹겹이 층이 생기는 페이스트리식 반죽인데 지금의 평평한 호떡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호떡이 붕어빵보다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고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보니 잘하는 집을 찾기 어렵다. 가끔 단순하게 기름 없는 구운 호떡집도 종종 보이는데 아무래도 기름이 좔좔 흐르는 호떡맛은 따라갈 수 없다. 호떡도 붕어빵처럼 속재료가 다양해지면서 개개인의 취향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종이컵에 대충 끼워진, 혀가 데면서도 호호 불면서 먹는 꿀호떡 맛은 따라갈 수 없다.




찬바람이 서늘하게~ 호호호빵

'호호~' 불어 먹는다는 호빵.

호빵의 원형은 바로 찐빵이다. 그중에서도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의 ‘안흥찐빵’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명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흥찐빵이 전국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IMF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언론이 ‘추억의 음식’으로 조명하면서 ‘원조 안흥찐빵’ 주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함께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찐빵을 집에서도 간편하게 먹을 수 없을까?
이 질문이 바로 호빵의 출발점이었다.

1969년, 삼립식품 창업자 허창성은 일본을 방문한다.
그곳 거리에서 팔리는 뜨끈한 찐빵(일본식 ‘츄카만’)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한국 제빵업계의 비수기인 겨울철에 팔 수 있는 제품으로 고안된 호빵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971년, 삼립호빵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호빵’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뜨겁다는 의미를 넘어
“호호 불어 먹는다”, “온 가족이 호호 웃으며 함께 먹는다”는 따뜻한 정서를 담고 있다.

그 덕분에 호빵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한국 겨울의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제 우리는 어떤 브랜드의 제품이든 겨울에 뜨끈한 찐빵류를 보면 자연스럽게 “호빵”이라고 부른다.



삼립은 2010년에 ‘호빵’을 상표로 등록하려 했지만,
‘보통명사’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는 ‘초코파이’가 상표로 인정되지 않은 것과 같은 사례다. 한때 다른 업체들이 “호빵”이라는 단어 사용을 조심했지만, 결국 지금은 “OO호빵” 형태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삼립의 자회사였던 샤니가 한때 내놓은 ‘팡찌니’ 역시 그 시절 상표 이슈를 피해 만든 이름이었다.


1971년, 삼립식품이 처음 선보인 호빵의 가격은 개당 2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50원 하던 시절이니, 지금 가치로 따지면 2,000원 이상의 ‘고급 간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따뜻한 빵 한 조각에 열광했다. 겨울철 거리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스테인리스 찜통은 어느새 계절의 풍경이 되었고, 호빵은 ‘겨울의 맛’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런것도 만드는 삼립.. 생각보다 괜찮았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삼립호빵 몹시도 그리웁구나.”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광고를 넘어 그 시대 겨울을 대표하는 감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78년도에 처음 나온 곡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1990년대 후반 같은 멜로디가 또 한 번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펭귄과 북극곰이 등장하는 영상 속에서 펭귄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장면이 유쾌하게 이어지며 그 CM은 새로운 세대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멜로디에 살짝 코믹한 연출을 얹은 이 광고는, ‘호빵=겨울’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각인시켰다.


요즘 안보이는 찜기


요즘은 정말 새로운 간식거리가 매달, 아니 거의 매일 쏟아져나오는 것 같다. 새로운 맛을 찾아먹는 것도 분명 즐겁다. 하지만 나는 길거리에서 마주칠 간식들을 위해 언제나 가슴속에 3천 원을 지니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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