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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Aug 16. 2018

<용순>

나만 참아야 하는 세상이 미웠던 나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처음으로 끝까지 매달려봤다.
출처: 영화 <용순>

어린아이처럼 무언가에게 집착해보고,

무심한 듯 쮸쮸바를 짜주는 소년의 모습에 가슴 설레었고,

유치한 시구절을 맘 속에 담으며 눈물도 흘려보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무던히도 더웠던 어느 여름, 열여덟 용순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움직였다. 학교 체육 선생님과 사랑에 빠져 비밀 연애를 하고 있던 용순은 어느 순간부터 그가 연락도 자주 안 받고, 자신과 만나는 걸 주저한다는 걸 깨닫는다. 체육에게 여자가 생긴 게 분명하다. 용순은 문희, 빡큐와 함께 체육을 뒷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쳐서 집에 들어오면 용순은 시도 때도 없이 아빠와 부딪친다. 어릴 적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서 용순은 아빠와 단둘이서 살아왔다. 그런데 아빠가 한 몽골 여자를 새엄마라고 데리고 왔다. 아빠가 여자에 미친 게 아닐까. 진작에 엄마가 살아있을 때 그 여자에게 하는 것처럼 잘하지 그랬어. 

출처: 영화 <용순>

그런 용순에게 아빠는 참다못해 말한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너만 맘을 열면 다 괜찮아진다고.


한 때,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남들은 나에게 가지각색의 이유들로 그들만의 사정을 이해해주길 바랐고, 정작 그들은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용순에게도 남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사정이 있었다. 어린 용순을 일찍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기억은 오래된 선풍기를 붙잡고 있는 빨랫줄과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잘한다고 칭찬해준 체육은 용순에게 '미련'이었고, 새엄마를 데리고 온 아빠는 용순에게 '원망'이었다. 가지 말라고 엄마를 붙잡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 대한 '후회'였다. 그리하여 용순은 처음으로 숨이 가빠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달렸다.


겉으론 매섭게 화를 내도 남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는 용순에겐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둘도 없는 친구, 문희와 속도 없는 친구, 빡큐. 미행하기 위해 아빠 몰래 야밤에 스쿠터를 몰다가 사고를 내거나 미묘한 눈빛으로 빡큐를 바라보는 문희의 모습 등 엉뚱한 10대 아이들의 좌충우돌 코미디를 지켜보면 괜히 맘이 흐뭇해진다. 용순이에게는 엄마가 없었지만 늘 잔소리를 하면서도 언제나 너의 편이라고 말해주는, 그리고 친구의 비밀을 위해 소화기를 뿌리면서 대소동을 벌이는 이 친구들이 있어서 그래도 그녀의 여름밤이 조금은 선선해지지 않았을까.

출처: 영화 <용순>

조약돌에 새겨진 그림은 강물에 지워지지 않았다. 

뜨거운 몸과 마음은 강물에 누워있어도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리고 흐르는 이 눈물도 아픈 기억을 채 씻어주지는 못했다. 


우리에게도 용순과 같이 가슴에 맺힌 사연들이 있다. 영화 <용순>은 그런 우리에게 단순히 상처를 잊으라고 권유하거나 새롭고 좋은 기억들로 공허한 마음을 채우라고 무책임하게 말하지 않는다. 정면돌파. 할 수 있는 때까지 부닥치고 뜨겁게 사랑하고, 아파해보는 것. 그 아픈 기억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붙잡아보자고 용순을 통해 이야기한다. 소란스럽던 그 해 여름도 지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무더운 여름 향기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용순>은 바로 그 여름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용순은 뛰었고 떠나질 않길 붙잡았던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는 앞을 보고 달린다. 온 마음을 다해 뜨거웠던 용순의 여름날은 그 어느 때보다 시원했다. 


평점: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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