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사원으로서는 마지막 진급을 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수평문화를 지향하며 직급을 없애고 있다. 자연스럽게 진급도 비공개로 진행한다. 이러한 흐름 덕분에 나 또한 얼마 전의 마지막 진급을 조용히 맞이했다. 이제부터는 소수의 능력자들만 임원의 단계로 올라가고, 승진의 경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에서 임원 승진의 확률이 0.9프로 정도라고 하니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번이 마지막 진급임이 자명하다.
마지막 진급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과거의 경험과 비교해 봤을 때 이번에는 매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마치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동안은 직장생활의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마지막 결승선이 또렷하게 눈앞에 그려지면서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복잡 미묘한 시원섭섭함은 회사생활에 대한 마음 가짐이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외의 소득이었다.
오피스 라이프가 유한하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요소들에 집중이 됐다. 보고할 때마다 밀려오던 짜증대신, 보고를 통한 자기 효능감이 느껴졌다. (그래! 나의 논리를 활용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있구나. 이것도 하나의 능력이지!) 구내식당 메뉴판 앞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렇게 남이 차려주는 밥을 삼시세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은퇴 후, 나의 식단은 이렇게 다양하지 못할 것이다.
9년 전, 삼성생명의 “당신에게 남은 시간”캠페인이 떠오른다. 건강검진 대상자들이 응답한 생활습관을 토대로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을 계산하여 알려주는 캠페인이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시간에 사람들은 당황했고, 가족들과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캠페인 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큰 공감을 하며 눈물짓게 만들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의 태도와 선택은 달라진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이별의 때는 결국 온다는 것이 체감이 되자 약간의 태도 변화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새로 시작하는 월요일, 출근해서 제일먼저 근속연차 말고 남은 연차를 가늠해 보면 어떨까? 회사를 어떻게 생각할지 우리의 선택이 달라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