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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Oct 27. 2024

1장. 기억(2)

아빠는 그날 중요한 비즈니스 저녁 식사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하고 늦은 시간에 돌아왔다. 간병인은 아빠가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추가 수당을 받고 퇴근했다. 술을 마시고 얼굴에 붉은 기가 있는 아빠의 얼굴이 매우 낯익었다. 항상 남색 정장에 흰 셔츠, 붉은 넥타이, 위쪽으로 절반만 검은 테두리가 있는 반 무테안경, 그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술을 잔뜩 마셔도 이성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하지만 마치 어제 본 것 같은 아빠의 얼굴을 확인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나는 아빠에게 살갑게 구는 아들은 아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몇 개월 동안 깊은 잠을 잤다고 생각해라.”

“네, 내일 시간 되시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엄마도 궁금하고요.”

“아니다. 바로 씻고 올 테니, 잠시 이야기 좀 하자. 기다려.”


아빠는 조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안방으로 향했다.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빠를 기다렸다. 정확히 30분. 그의 샤워 시간은 늘 같았다. 샤워하고 머리까지 바짝 말린 상태, 어두운 실크 잠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위스키를 숨어서 마시는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당당히 고급 양주가 가득 차 있는 장에서 한 병을 꺼내어 어두운 식탁에 앉았다. 나도 아빠를 마주하고 따라 앉았다.


“모든 진실은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될 테지만, 일단 중요한 변화부터 이야기해 주마. 3개월 전에 너는 학교 후문에 있는 분리수거장 구석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됐어. 머리에 큰 상처가 나서 응급으로 수술을 했지. 학교 경비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위험했을 거야. 그렇게 의식을 못 차린 지가 3개월이야. 병원에 한 달 정도 있다가 엄마가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해서 옮겨왔어. 실력 좋은 의료진을 힘들게 구해서 잘 살펴보고 있었던 거야. 고등학교 입학하고 2년 동안 학교에 많은 괴롭힘을 당했었어. 지금 네가 기억은 못 하겠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 고등학교 때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나는 늘 약자였어요. 그게 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는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네가 내색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어. 그렇게 발견되고 나서야 네 학교생활을 알게 된 거지. 기억을 못 하는 게 놀랄 일은 아니야. 그 나쁜 자식들이 너를 워낙 못살게 굴었으니 어쩌면 기억을 못 하는 게 다행인지 모른다.”

“그럼 엄마는요?”


나는 가장 궁금한 질문을 했다. 아빠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위스키를 한잔 더 따라 마셨다.


“나 때문에 이혼했어요?”


아빠는 위스키를 연이어 들이켰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네 엄마는 지금 용인 납골당에 있어. 너 그렇게 되고 우울증이 심해졌어. 처방받은 약도 내성이 생겨서 잘 듣지 않았고. 그러다가 한 달 전에 네 옆에서 그렇게 됐어. 그래,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구나. 감당할 수 없더라도, 차근차근 받아들여야 해.”


전혀 예상치 못한 아빠의 대답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원이 나간 로봇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민아,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아. 잘된 거야. 네가 깨어나면 어떻게 헤쳐나갈지 아빠가 다 준비를 해놨으니까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 컨디션이 나아지면 엄마한테도 다녀오너라. 괜찮을 때 말해주면 권 비서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네, 인제 그만 올라가서 쉴게요.”

“그래, 정민이 네가 돌아와서 아빠는 기쁘다. 고맙다.”


나는 어두운 주방을 뒤로하고 내 방으로 이동했다. 엄마가 없는데 내 기억이 돌아와서 기쁘다니. 말도 안 돼. 취기가 올랐음에도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아빠의 눈빛은 또렷했다. 아빠는 술을 마시는 순간까지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부자연스러운 저 또렷함이 거북했다.


감정의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아, 온몸에 힘을 주고 계단을 올랐다. 다리의 힘이 풀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까 봐 난관을 꽉 붙잡고 한 계단씩 꾹꾹 눌러 올라갔다. 굴러 떨어져서 아픈 것보다 ‘너와 엄마는 왜 항상 그 모양이냐’고 질타받은 것을 피하려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섰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일단 방까지 무사히 가보자. 그때 감정을 터뜨리자. 지금은 안 된다. 벽을 잡고 겨우 방 안에 도달했다. 손잡이가 보이지 않아 몇 번을 놓치다가 겨우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까지 걸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엄마는 나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엄마밖에 없었다. 내가 아플 때 나보다 더 아파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엄마가 없는 곳에 있다. 이제는 각자 혼자다.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괴롭힌 가해자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의 머리통을 가격한 그 새끼 때문이었다. 가해자 중에 한 명일 수도 있다고 했다. 잡지 못했으니 그 새끼는 자유롭게 이 세상을 누비고 다닐 것이다. 내가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을 엄마는 영영 모를 수도 있었는데 그 새끼 때문에 알게 됐을 것이다. 엄마가 모르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참았었는데. 지난 2년간 나를 괴롭혔다는 가해자들의 얼굴도, 고통의 기억도 없지만, 엄마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내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의 상처가 엄마의 연약함을 건드렸다. 차가운 아빠가 엄마를 따뜻하게 보냈을 리 없다. 엄마에게 미안해져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빠는 우리 집의 확실한 의사결정자였다. 엄마나 내가 의견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 선택지별로 결과를 미리 시뮬레이션해 보고 최적의 선택을 했다. 우리에게는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식이었다.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 다닌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집이 팔리고 난 뒤, 아빠는 이사 날짜를 통보했다. 갑자기 날아든 이사 소식에 엄마는 애가 전학하고 적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따져 물었다. 계약을 파기하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아빠는 냉정한 표정으로 이사를 하기 싫으면 배액 배상할 돈을 구해 오라고 협박했다. 엄마는 돈을 빌릴 수 있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엄마에게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엄마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아빠와 말을 섞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쟁은 오래가지 못했고, 늘 아빠의 승리로 끝났다. 돈을 가진 자는 강자였고 강자는 늘 전쟁에서 이긴다.


나는 친구들과 추억을 쌓을 충분한 시간과 기회도 없이 전학을 다녔다. 전학은 꽤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전학을 처음 간 날이면, 수많은 아이의 눈이 내가 어떤 종인지 가늠해 보려 바삐 움직였다. 나를 다각도로 살피면서 초식동물인지 육식동물인지 살폈다. 나의 행동, 말투, 옷차림, 소유한 물건들이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그들을 누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거나 멋진 외모의 소유자였다면 적응하는 데 조금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조금 우월한 점은 돈 많은 아빠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터득한 요령도 있었다. 제일 먼저 교실에 입성하게 되면, 이미 형성된 그룹들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과 입지를 살핀다. 그다음 어떤 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리한지 관찰하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먹이사슬 맨 위에 있는 포식자 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전학생으로 살아가는 데는 가장 유리했다. 그룹을 선택하면 나는 계획을 세웠다. 그전까지는 말없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내 정보가 사전에 노출될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내가 속하고 싶은 그룹을 선정하면 먼저 그들의 동선을 살펴야 한다. 동선 파악이 완료되면, 그들이 학교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 시간에 딱 맞춰 아빠의 비서에게 나의 픽업을 요청한다. 먼지 한 톨 없이 매끈한 검은 벤츠와 비서님이 교문에서 대기하고 있다. 어김없이 아이들의 관심이 누가 그 차에 탈지에 쏠린다. 사람들의 시선을 비집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서가 열어주는 차에 미끄러져 들어간다. 아이들의 시선이 나의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안이 보이지 않도록 선팅이 차 안에서 아이들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나를 보며 술렁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멀어진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집으로 간다. 머지않아 나는 분명 저 그룹에 영입이 될 것이다. 영입된 기념으로 가장 비싼 햄버거를 사면 임무는 완료된다. 그것이 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나는 초식동물이었지만, 부유한 초식동물이었기 때문에 육식동물들 틈에 끼어 지낼 수 있었다. 체구도 작고 연약해 보였지만, 어쨌든 강자들이 속한 그룹 소속이었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로 암흑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들 사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 기억이 멈춘 17살, 친구들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새롭게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것이고 새로운 친구들을 탐색했을 것이다. 탐색과 전략이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이 사라질 만큼 심하게 맞았다는 것은 내가 약자 중에서 약자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2년 동안 먹이사슬 어디쯤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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