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밀도 Apr 11. 2021

06. S급 증강 노인

노인 범수/청년 찬

범수/찬


범수는 특별한 케이스였다. 증강 주사의 효과가 다른 참가자보다 1.5배 이상 높았다. 정부도 이런 희귀한 사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범수는 자신에게 증강 주사가 젊은 시절보다 더 큰 활기를 주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오랜 기간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이제는 4시간만 자도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30년간 이어온 아침 습관에서 범수는 자신의 인지능력이 젊은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매일 아침 BBC 뉴스를 켜놓고 영어의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범수였다. 매일 하던 루틴이 어느 날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범수가 애쓰지 않아도 BBC 뉴스 앵커가 하는 말의 전체 맥락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전치사조차 귀에 와서 박히는 느낌이었다. 당장 앵커가 말한 문장을 적으라고 한다면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적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범수의 데이터는 국가에서 관리했고 증강 노인 Certification에 S 마크가 붙었다. 기업들은 앞 다투어 S급 증강 노인인 범수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국가가 상위 증강 노인을 표시해 주는 데에는 정부 지원금을 아낄 요량도 있었다. 범수처럼 S급의 증강 노인을 고용할 경우, 정부에서 지원하는 10%의 지원금은 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기업이 70%의 인건비만을 지출하고 최상의 노동력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더구나 범수는 은퇴하기 전의 포트폴리오가 워낙 좋아서 이미 업계에서는 그의 복귀 소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헤드헌터들이 교육이 끝나면 범수를 꼭 잡겠노라고 벼르고 있었다.     


범수는 조건이 상당히 좋은 여러 회사의 제안서를 받고 고심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들 기준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는 동네였다. 아들 기준을 스스로 찾아가 마주할 자신은 아직 없지만, 우연을 가장해서 마주친다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기준이도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만남 앞에서 얼떨결에 범수의 손을 잡아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범수가 선택한 기업은 A 구역에 위치한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몸이 가뿐해진 범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첫 출근길에 올랐다. 집에서 1시간이 넘는 거리임에도 멀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을 보러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전철 개찰구를 내리려는데 재킷 안에 넣어두었던 카드 지갑이 만져지지 않았다. 바지 뒷주머니와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저기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아… 고마워요. 떨어뜨렸는지도 몰랐네요."  

   

"네, 아래층부터 쫓아왔는데 엄청 빠르시네요. 겨우 따라잡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첫 출근을 잘할 수 있게 되었어요. 흠.. 이거 제 옛날 명함인데 이 근처로 출근하신 거면 연락 한번 주세요. 커피 한잔 살게요."     


"아닙니다. 그럼 저도 출근하러 가야 해서… 첫 출근 힘내세요!"     


범수는 그 청년을 보면서 기준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미정이 죽고 2년 뒤 범수는 은퇴를 했다. 오랜시간 충성을 다해 일했지만 명예로운 은퇴는 아니었다. 범수가 많은 동료과 선후배를 정리해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정리 당했다. 숨 가쁘게 달렸던 지난 세월이 허공으로 흩어진 느낌이었다. 범수의 손에 남은 것은 회사에서 주는 위로금과 퇴직금을 합친 3억, 미정이 가꾸어온 집 한 채가 전부였다. 8년 만에 회사라는 조직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시간의 여백을 견딜 수 없어 매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는데 실전은 더욱더 낯설게 느껴졌다.     


범수는 곧바로 7층 전략기획실로 향했다. 팀원들과 상견례를 하는데 아침에 카드 지갑을 주워준 청년이 맨 끝에 앉아 있었다. 몹시 반가워서 절로 표정이 밝아졌고,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자신감 넘치는 범수의 모습으로 비쳤다.     


"한범수님입니다. 흠.. 직급은 정해지는 대로 다시 말씀드릴게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상당히 어렵게 모시고 온 분입니다. 낯선 부분이 많을 테니 많이 도와주세요. 김 찬 대리가 자리 세팅하는 거라 회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옆에서 알려주면 좋겠어요. 괜찮죠?"   

  

"네! 성심껏 알려드리겠습니다."     


범수의 마음이 든든했다.     


"범수님 첫 출근이 저희 회사셨군요! 엄청난 인연이네요. 제가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제가 첫날부터 대리님께 많은 도움을 받네요. 저도 도울 일이 있으면 좋겠어요. 참! 커피는 오늘 바로 제가 사겠습니다. "     


얼굴이 하얗고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진 청년 찬은 아직도 학자금 대출을 갚는 중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5년도 넘었는데 아직 1년은 더 갚아야 한다. 다행히도 직장의 신용을 담보로 은행에서 상환을 유예해주고 있었다. 31살의 찬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찬의 엄마는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고 있고 곧 은퇴를 앞두고 있다. 찬의 아빠는 오래도록 우울증을 앓았다.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라는 병이 있는지도 몰랐고, 약으로 치료되는지도 몰랐다. 찬의 아빠는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심연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서는 몇 달을 두문불출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날에 세상으로 나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동네 사람들은 찬의 아빠가 동굴로 들어가 버릴 때면 신기가 있다고 신내림을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가볍게 얘기했다. 찬은 그 말이 너무 두려워 가본 적도 없는 교회를 찾아가서 울부짖었다. 하지만, 찬과 찬의 엄마가 생계를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어느 날, 찬의 아빠는 안방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일찍 끝내고 집 앞에서 파는 붕어빵을 들고 집으로 간 찬은 용기를 내어 안방 문을 두드렸다. 찬의 아빠가 좋아하는 붕어빵이 그의 코끝을 자극하면 기운을 차릴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거실로 연결된 베란다도 잠겨 있었다. 베란다의 유리창으로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데 자세히 보기가 두려웠다. 베란다 구석에 있는 소화기를 들어서 창문을 깨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갈하게 단장을 한 채 찬의 아빠는 넥타이 끈에 매달려 있었다. ‘이제 끝이다.’라고 겨우 쓴 메모 한 장만을 침대 머리맡에 남겨져 있었다.     


찬은 범수를 보고 아빠가 살아있다면 저 나이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도 삶만 유지하고 있었다면 범수처럼 증강 주사를 맞고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 왔다.      

 

 

이전 05화 05. 속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