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좋은 인간관계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네요.
어릴 적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태어났으니까요 그냥 살아요!” “돈 벌려고요!” “성공하려고요!”라고 외쳤지만 나는 속으로 행복하려고 산다고 읊조렸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너무 꿈이 원대했던 걸까. 행복해지는 법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행복하려면 돈이 많아야 하는 걸까? 가지고 싶은 것을 소유할 때 행복하니까. 근데 부자들 중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행복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걸까?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니 행복하지만은 않다. 몰입의 순간이 주는 아드레날린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말 전부일까?
나의 고뇌는 깊어졌다. 행복이라는 것은 본디 스쳐가는 바람 같은 걸까. 성취에서 오는 행복, 소비에서 오는 행복 모두 찰나일 뿐이었다. 다시 또 다른 성취, 또 다른 소비를 통해 찰나를 이어가야만 계속된 행복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것은 나에게 절망적이었다. 나는 그만 성취하고 싶었고 그만 소비하고 싶었다. 성취하고 소비하기 위해 기나긴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찰나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테드에서 한 강연을 보게 되었다. 하버드에서 80년간 몇 사람을 선정해서 죽을 때까지 쫒았다니며 조사를 해보니, 결국 질 좋은 인간관계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 제일 행복하게 살다 죽었더라.라는 내용이었다. 사람은 극도로 질 나쁜 관계를 계속할 경우 스트레스 때문에 죽음에 이를 수도 있고, 질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 덕에 죽음을 이겨낼 수도 있을 만큼 ‘관계’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 질 좋은 관계.. 좋지. 하지만 현대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싶은 사람을 선택적으로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일하고 살아간다. 왜 이런 식의 업무 환경과 사회 구성원이 이루어졌는가 심각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이런 환경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인 것이다. 이 망할 자본주의, 이 망할 컨베이어식 생산 구조. 거기서 온 위계 구조와 경쟁적 평가 시스템. 구조가 사람들이 서로 온전히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누군가는 저런 연구 만으로 어떻게 믿지?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저 강의를 본 이후로 분명하게 내가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이 우선인지를 정하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선 포기할 것이 많아질지도 모르지만, 절대로 부나 명예, 여타 다른 이유 때문에 주변 친구와 가족을 뒷전으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경우든 절대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 직장생활이 걸려있다고 해도 잘라버릴 것이다. 생각해보면 맘 잘 맞는 친구와 동네에서 맥주 한 잔 하고, 남자 친구와 골목 어귀의 카페에서 말없이 책을 보는 것이 나에겐 몇 억보다 값어치 있는 행복이었다. 긴 방황 끝에 드디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