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맑음 Apr 03. 2018

스스로 부러지는 사랑을 위하여

정호승 <부러짐에 대하여>






꼿꼿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배운 적이 있었다.

청정한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가 칭찬받고,

어느 어려움에도 자신의 절개를 버리지 않고

부러질지언정 구부리지는 않는 것이 올바른 기개라면서.


그러나 어느 순간 부터,

그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부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껍데기만 남았다.

나의 그 굳건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과하지욕(袴下之辱)이란 고사성어에서,

한신은 그저 비굴한 겁쟁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품은 뜻이 바래지 않으리란 용기가 있었기에

치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용기는

그저 무릎꿇기를 싫어하는 치기어린 자존심보다

훨씬 더 가치있었다.


만일 자신을, 그리고 남을 사랑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부러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부러짐 그 자체보다 사랑없고 소망없는 삶을

더 끔찍히도 싫어할 것이다.

그래서 의연하게, 스스럼 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삶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나뭇가지들로 지어진 새집,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난 새 생명 출처:http://mhdc.tistory.com/5048

 




정호승 시인은 유난히 사랑에 대해서 쓴다.

그리고 그는

바람에 아니 뫼는(흔들리는) 뿌리깊은 나무보다,

앙상하게 마르고 쉬이 부스러지는 겨울 나무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좋아서 호탕하게 웃는 기쁨에게,

골목길에 과일을 파는 할머니를 생각하는 슬픔이

가르침을 주기도 하고,

기울지 않는 달은 오만한 것이라

적어내려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호탕하고 화려하고 기개넘치는 주인공이라기 보단,

주변을 돌아보는 배려가 넘치는 BGM인가 보다.

누구나 알고 부러워하는 세기의 로맨스를 그려내기보다,

오늘 사라져도 내일 아무도 모르는,

한낱 재와 같을 지 모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들을

자꾸만 떠오르게 하는 것을 보면.


 



부러짐에 대하여

정호승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포옹(2010)> 창비. 중에서.




#참고 문학 #용비어천가 #슬픔이 기쁨에게 #반달



덧.

예고를 하고 시를 적는 편은 아니지만,

다음 손글씨는 나희덕 <못위의 잠>으로 하겠습니다.

새집을 이야기하니 떠오르기도 하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시라서요.

이전 10화 눈꽃같은, 그리고 봄꽃같은 옛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