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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아이 사탕이

by 부소유
강밀아 글, 최덕규 그림


주인공은 사탕이라는 소녀다.


사탕이는 착한아이로 유명하다.


하지만 사탕이는 표정이 없다.


누가 못살게 굴어도, 무서워도, 힘들고 아파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그림자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사탕이는 마트에서도 한 번도 조르지 않고 부모님 말도 잘 듣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누군가 잠자는 사탕이를 깨운다.


그림자 같은 그는 사탕이에게 그동안의 불만을 토로한다.


그의 불만은 아프고, 힘들고, 불편하고 그런 상황들에서 참지 말라는 것이다.


사탕이는 그래도 되냐고 되묻는다.


그는 그래도 된다고, 다 해도 된다고 한다.


사탕이는 이제는 할 말을 다 하고 다닌다.


그렇게 사탕이도 그림자도 웃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그 옆을 제2의 사탕이가 지나간다.




착한아이 사탕이 표지에는 단아하고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는 소녀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서있다. 하지만 뒤에 비치는 그녀의 그림자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불만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에 비해 뒤표지의 사탕이는 전혀 다른 아이 같은 얼굴이다. 웃는 얼굴로 심지어 윙크를 하며 앙증맞은 자세로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착한아이? 착한아이! 와 같이 느낌표와 물음표를 던지는 글씨가 눈에 띈다. 그림책의 제목인 ‘착한아이’는 검은색의 점점 작아지는 글씨체, ‘사탕이’는 달콤한 사탕 무늬의 개성 있는 글씨체이다. 표지와 제목에서 이미 이 그림책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책의 앞 뒷 면지 또한 사탕이가 달라지기 전 후의 시간을 주마등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림책의 전체적인 색은 톤이 다운된 파스텔 톤의 편안한 그림이다.


착한아이 사탕이는 모순으로 가득한 그림책이다. 착한아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세상이 소녀에게 만든 관념이었다. 그녀는 사실 울고 싶고, 화내고 싶고, 조르고 싶고, 짜증 내고 싶은 평범한 아이였다. 착한아이라는 프레임은 사실 주변에서 만든 겉모습이었다. 아이의 그림자가 실제 아이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고 그 그림자는 결국 아이가 잠자는 동안 폭발하고 만다. 내면의 그림자는 심리학을 주워 들었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유명한 심리학자 칼융이 자주 말했던 개념이다. 그 그림자는 사실 내가 인정하기 싫어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그림책 작가도 그것을 의식해서 이 그림책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그림자가 있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거부하며 살아간다. 나의 진짜 본연의 모습은 뭔지 고민해보지도 못한 채 자아를 잊고 살아간다. 어느 날 문득 나를 돌아보지만 그때는 늦었다. 빨라야 마흔. 보통은 쉰, 혹은 예순. 환갑이 되어서 나를 돌아본다. 우린 대부분 반평생, 혹은 거의 평생을 진짜 내가 누군지 감추며 하고 싶은 일은 뒤로 하고 끝없이 참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그에 비해 일찍부터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삿대질, 손가락질을 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한다. 사실은 그 모습이 부러울 텐데도 말이다.


착한 것이 뭘까. 착하다는 것은 그저 나쁘다는 것의 반대일까. 그렇다면 착하다는 기준과 나쁘다는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일까. 언제까지 그 기준에 따라서 맞춰 살아가야 하나. 사탕이가 착한아이라면 사탕이 동생은 나쁜아이 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착한아이 사탕이는 스스로 알을 깨고 본연의 모습을 찾았을 때에야 비로소 사탕이가 된다. 착하고 나쁘고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사탕이의 모습을 보고 누구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사탕이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만드는 틀을 뚫고 나가자. 시스템에 안주하지 말고 시스템을 뚫자. 아브락사스를 추구한 데미안이 되자. 그렇게 알을 깨고 나를 찾자. 그 모습이 착한 모습인지 나쁜 모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들의 판단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나아가자. 사탕이의 변화는 제2의 사탕이를 변하게 만들고, 그 작은 변화가 사회를 움직이고 우주를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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