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서울에 왔어. 도착한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해. 버스 기사님이 깊숙이 박힌 트렁크를 꺼내 주시기에 얼른 내려서 받아 들었지. 새어 나오는 김칫국물에 서울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만 같아. 언니네까지 가는 길엔 생전 처음 보는 인파가 어깨를 치며 지나갔고.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행여나 내 작은 콧망울을 쓱 베어갈까 눈을 부릅떴지.
오자마자 극장 경리 일을 시작했어. 수입과 지출을 매일 체크하고, 세금계산서를 예쁘게 오려서 전표를 발행했단 말야. 그러다 창구 여직원이 갑자기 빵구라도 내는 날에는, 도대체가 책임감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걸까 불평하면서도, 창구에 섰지.
표를 사러 온 남자들이 힐끗거리는 걸 종종 느꼈어. 학생 때야 살이 잔뜩 올라 눈코입이 실종됐다지만, 돈 벌면서는 밤낮으로 운동을 다니니 젖살이 쏙 빠졌단 말야. 나한테 추파를 던지던 여럿 중 한 명은 말할 것 없이 끈질겼어.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너무 좋다는 거야. 일찍 끝나는 날에도, 늦게 끝나는 날에도,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충정로역 광장에 우두커니 앉아있었어. 충견 같이 기다리는 모습이 어찌나 싫은지 부러 뒷문으로 나가거나, 여자 동료들 사이에 숨어다녔지. 그런데 시력도 좋지, 그는 나를 매번 발견했어. 어쩌면 저렇게 배알이 없을까.
내가 그이를 만날 수 없는 건 삐뚤한 치아와 푸석한 곱슬머리는 둘째 치고, 막연했던 ‘두려움’때문 아닐까. 엄마는 늘 나한테 강조했어. ‘남자 조심해야 한다. 아무나 만나지 말아라. 여자는 조신하게, 부모님이 지어주는 인연에 응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일을 그르친단다.’ 나는 남자를 만나는 게 두려웠어. 선을 넘으면 안 되잖아. 실체 없는 두려움이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집어삼킬 수 있을까. 나 좋다는 구애에 한 번을 대답않고, 피어나는 욕망을 외면했어.
한 번은 그 남자가 단호하게 말하는거야. 나는 눈을 감고도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고, 한 번만 만나줄 수 없겠냐고. 그때 그 이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불꽃이 피어오를 때야 별도 달도 따오지만, 곧 사랑은 가고 관성만 남는다는 걸 배웠겠지? 사랑은 덧없는 거라고 몸서리쳤을 거야.
그런데 차라리 쓴 맛을 봤어야했어. 나는 온실 속에앉아 무해한 구원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거야. 누구를 만날지 조차 결정하지 못했던 내가 바보같아. 어쩌면 말이야. 사랑하는 여자를 우두커니 기다리는 남자가, 도망가는 나보다는 용기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