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조 : 우리 자신의 물질성 physicality에 대한 평온함. 내면과의 평화로운 커뮤니케이션.
확언 : 나는 완전하다. 나는 모든 측면들을 나의 존재 안으로 통합한다.
“우리가 좀 더 편안해질 때(at ease), 우리는 질병(dis-ease)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Mike Booth 외, 2006).”
몸 따로 마음 따로 일 때가 있다. 마음은 저만치 가 있는데 도통 몸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면 몸이 나를 가둔 듯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떤 날은 할 일이 산더미인데 몸에 탈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땐 내 몸에 마구 짜증을 내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투명인간이 되어보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내 몸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것까지 가능할까, 뭘 제일 먼저 해볼까,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1번 바틀이 말하는 물질성 physicality이란 무엇일까? ‘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많은 한계를 가진 우리의 몸, 그것이 물질성 physicality이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는 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령 유체이탈이 가능한 사람이라 해도 영원히 몸 밖을 벗어난다면 그게 과연 ‘사는 것’일까 의아해진다.
당신은 당신의 몸을 얼마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가? 먹고 싶고, 화장실에 가고 싶고, 자고 싶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구들을 당신은 얼마나 자유롭게 조절하며 살고 있는가? 몸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참 쉽지 않은 일 같다.
그런데 몸을 꼭 내 마음대로 통제해야 하는 것일까? 거꾸로 몸이 요구하는 대로 마음을 조절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벼움으로 혹은 무거움으로, 짜릿함으로 혹은 고통스러운 통증으로, 덜컹거리거나 쿵쿵대거나 콕콕 쑤시거나 간지럽거나 뜨겁거나 시원하거나 차오르거나 텅텅 비거나 등등, 몸은 쉼 없이 마음에게 말을 건다. 몸의 방식으로. 우리에게는 마음의 소통방식인 ‘말’과 ‘언어’가 익숙해서 몸이 건네는 말이 낯설 수 있다.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도 한다. 불편해서 모르는 척 외면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은 소통하기가 어려운 걸까?
재미있는 게 있다. 말과 언어로 하는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라는 녀석은 몸을 표현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몸을 통해 소통을 시도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신체화 증상’이라고 말한다.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관절이 쑤시는 등 몸 여기저기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병원에 가면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이다. 이럴 때 가장 흔하게 붙는 진단명이 ‘신경성’이다. 병원에서 증상을 가라앉힐 수 있는 처방전을 받아서 약으로 몸을 달랜다.
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십여 년을 근무하면서 ‘진짜 약 같은’ 비타민을 찾아내는 데 선수가 되었다. 두통, 복통을 비롯해 가지각색의 불편감을 호소하며 보건실을 찾는 아이들에게 ‘진짜 약 같은’ 비타민을 주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을 괴롭히던 증상이 가라앉는다. 중요한 건 그 비타민을 아이들이 ‘진짜 약’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순간 증상을 가라앉히는 마법은 사라진다. 몸의 증상을 통해 아이의 마음이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는 방법, 제일 처음은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몸이 건네는 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들어주는 것.
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몸 뒤에 숨어있던 마음이 제 말을 하기 시작한다. 1번 바틀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것도 이런 게 아닐까? 실제로 Vicky가 만든 1번 바틀은 많은 사람들의 육체적 불편감을 경감시켜주었다. 이 바틀 이름이 육체 구조 Physical Rescue인 것은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몸을 구조하려면 몸의 말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몸이 건네는 말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1번 바틀이 자꾸만 손짓하는 당신,
혹시 몸의 말을 무시한 채 마음으로만 살려고 하는가?
내가 가진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몸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서 마음만 저 멀리 도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몸은 나의 마음과 세상이 소통하는 ‘장 field’이다. 마음은 몸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걸고, 세상은 몸을 통해 들어온다. 몸의 모든 감각과 움직임을 통해서. 그 장 field으로 마음을 다시 데리고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