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걱정, 너는 오지랖
어렸을 때 자주 하던 걱정이 있다.
껌을 감싼 종이에서 껌만 쏙 빼내고 나면 껌 종이가 너무 감쪽같아서 그게 빈 종이인지 껌이 든 종이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게 걱정이었다. 누군가 껌이 있을 줄 알고 종이를 펼쳤는데 껌이 없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싶은 마음에 껌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거나 마구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과자나 사탕 봉지도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이 되어서 나를 집에 바래 주는 이가 생겼을 때는 그가 혼자 돌아갈 길이 걱정되었다. 바래 주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꿈쩍도 안 하던 그를 결국 집 앞에서 보내면서 마음속에 걱정을 한 보따리씩 쌌었다.
어느 날 둘째가 친구와 강릉 문화재 야행에 놀러 갔다 오는 길에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친구 집 근처까지 바래 주고 와도 돼? 친구가 컴컴해서 무섭대."
순간 내 안에서 튀어나오려던 말. 미친~!!
다행히 그 단어가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한 단어를 긴 문장으로 풀어서 딸에게 말했다.
"너한테는 그 길이 안 컴컴해? 잔 말 말고 얼른 들어와."
내가 하는 건 걱정이고 딸이 하는 건 오지랖이었다. 내가 하는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딸의 오지랖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동네 카페에 다녀오던 길, 골목길에 쓰러져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다행히 의식이 있어서 대화가 가능했다. 119에 신고하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할아버지 곁에서 말동무나 되어드릴까 싶어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으려는데 남편이 옷자락을 잡아끈다.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다. 하는 수 없이 어정쩡하게 서서 허리만 구부린 채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넨다. 바닥에 닿아있는 할아버지의 뒤통수가 자꾸만 눈에 거슬려 뭐라도 받쳐주려는데 남편의 손이 이미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다. 나의 걱정은 남편에게는 오지랖이었다. 길을 가다 조금만 불편한 기색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 말을 거는 나에게 남편은 어쩌면 안전장치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의 걱정이 실은 오지랖일 때. 그걸 알면서도 남편이 옷자락을 잡아끌 때마다 짜증이 난다. 어쨌든 나에게는 진지한 순간이니까.
진지한 걱정과 쓸데없는 오지랖 사이의 경계는 너무나도 유동적이다. 누가 누구의 것을 보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정말 중요한 걱정이 다른 이에게는 쓸데없는 오지랖이 된다. 경계를 두고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딸이 나에게 짜증을 냈듯이 남편에게 내가 화를 냈듯이.
딸이 어두운 밤길을 무서워하는 친구를 바래다주고 온다는 말에 기가 막혔던 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올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딸이 나에게 짜증을 냈던 건 엄마보다 덩치 큰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오지랖 때문이었다. 남편은 혹시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을 텐데 내 몸 하나 내가 못 지킬까 봐 걱정하는 남편의 오지랖에 짜증이 났다. 누구의 걱정이 누구에게 오지랖으로 보여서 또 다른 걱정을 낳고 그 걱정이 또 상대방에게는 오지랖으로 보이는 상황, 결국 서로에 대한 걱정이 빙글빙글 꼬리물기를 하고 있었다.
오지랖이 잔소리로 둔갑할 때도 있다. 이런 때도 시작은 '걱정'이다. 작고 세세한 부분, 그 디테일 하나만 조금 신경 쓰면 더 좋을 텐데 그걸 못하는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잔소리가 된다. 보살핌의 욕구가 걱정이 되고, 그 걱정이 가장 거슬리는 형태로 발현되는 순간이다. 시작은 분명 사랑이다. 그 사랑이 걱정에서 오지랖이 되고, 오지랖에서 잔소리로 변질되면서 서로를 숨 막히게 한다.
어떡하지?
말을 하는 수밖에.
'너 때문에'라는 말 말고 '나에게 불안한 감정이 올라와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짜증은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러니까. 사랑하는 이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지키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을 인정하고, 이걸 말로 표현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 꼬리물기를 그만둘 수 없을지라도.
<마젠타 컬러의 키워드>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 감사하는 마음, 위로부터의 사랑, 경외감, 디테일에 강한
행동하는 보살핌,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 돌보는 자를 돌보는 자, 오지랖, 숨 막히는 사랑
마젠타 컬러가 끌리는 날, 당신에게는 어떤 키워드가 와 닿나요?
당신 마음에 닿는 키워드를 골라서 당신의 색깔 있는 하루를 글로 표현해보세요.
A.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 감사하는 마음
1. 나의 일상에는 당연한 것이 더 많은가, 놀라운 것이 더 많은가?
2. 내가 지금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무엇인가?
3.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세세한 부분을 잘 보는 편인가?
4. 하루에 몇 번이나 일상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가?
5. 요새 내가 좀 불평불만이 많아졌나? 잔소리가 많아졌나?
B. 행동하는 보살핌,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
1. 나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잘 챙기는 편인가?
2. 사람들이 내가 주는 작은 선물에 많이 감동하는 편인가?
3. 나는 나를 잘 돌보는가?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 나에게 익숙한가?
4. 오지랖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가? 내가 좀 오지랖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