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대필작가다. 4

4. 나는 문장이 되고, 사라진다

by 김선희

기록되지 않은 삶은 사라진다. 그 말은 한때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문장처럼 맴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삶은 결국 사라진다. 육신은 소멸되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시간이 지나면 존재의 흔적마저 잊힌다. 그러나 그 안에 깃든 마음은, 진심이 담긴 언어는, 때로 그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남는다. 나는 그런 문장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다.


이름 없이 존재하는 글이 있다. 내가 쓴 글 가운데는 그런 문장이 더 많다. 표지는 내 것이 아니고, 추천사조차 남의 목소리로 씌어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책 안의 문장들, 단락과 단락 사이의 호흡, 말끝에 스미는 체온 같은 문체가 내 손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대필 작가는 자신을 지우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희생이라 믿고, 또 어떤 이들은 가치 없는 노동이라 여긴다. 나는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지운다는 것은 비워내는 것이고, 비운다는 것은 그 자리에 누군가를 온전히 채워주는 일이다. 나는 매번 그 빈자리에 타인의 삶을 빛처럼 얹어준다. 그 모든 과정은 글을 써본 사람만이 아는 깊은 기쁨으로 채워진다.


나는 많은 사람의 인생을 대신 써왔다. 주식투자에 실패한 어느 노인의 자기 고백서, 관계중독을 이겨낸 어린여자의 고백, 평생을 종교에 헌신한 유언 같은 삶. 그들의 말투와 문장 습관을 기억하고, 몸짓과 표정을 메모해두고, 인터뷰 녹음 사이에 스치듯 나온 감정의 흔적까지 문장 속에 엮는다. 그렇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 감정인지 그 사람의 감정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하지만 그 경계를 지켜내는 것이 대필 작가로서의 예의라고 나는 믿는다. 작가는 기록자가 되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장은 그 사람의 것이어야 하고, 나는 그 문장을 살아 있게 만드는 손이어야 한다.


글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었어도 내 이름이 남지 않으니, 언젠가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사람처럼 잊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 서운함과 공허함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글로 누군가의 삶을 조명해주고도, 조명에서 한 발 비켜 서야 한다는 감정. 마치 커튼 뒤에 서 있는 무대 연출자처럼, 박수는 들리지만 나를 향한 박수는 아니라는 자각. 나는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인생을 정리해주고, 용기를 건네고, 때로는 방향을 틀어주는 것을 보았다. 그 문장은 내 이름 없이도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그 문장을 통해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대필은 사라지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내면을 가장 정확하게 그려내는 정밀한 기술이다. 이름 없이 쓴다는 것은 지워진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를 더 선명하게 남긴다는 뜻이다. 글을 통해 드러나는 삶은 때로 말보다 더 깊다. 그리고 그 깊이를 대신 측정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쓴 문장은 내가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문장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글을 통해 마음을 얻는다면, 나는 다시 글을 쓸 이유를 찾는다.


글이 사라져도, 나는 남는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결, 쉼표 하나로 바뀐 감정의 방향, 어느 문단의 리듬감 속에 내 호흡이 들어 있다면, 그건 나다. 내 이름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 글이 살아 있고,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다면.

keyword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나는 대필작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