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일을 선택했는가
처음부터 이 일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글을 좋아했고, 글로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글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일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마음을 문장으로 풀어내는 일이 더 오래 내게 남았다.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나는 자주 ‘나는 왜 남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를 되물었고, 그 질문은 ‘남의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대필 작가라는 다소 낯선 직업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게 되었다.
대필 작가는 이름이 남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름이 없다는 건,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책임을 요구받는다. 나는 누군가의 생을 글로 대신 증언한다. 그 말에 담긴 감정, 망설임, 후회, 기쁨, 때로는 죄책감까지… 그 모든 것을 받아 적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한다. 내 문장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왜곡하지 않도록, 지나치게 꾸미지 않도록, 말의 진심을 흐리지 않도록, 나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단단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긴 시간의 인터뷰, 정제되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 상처 위에 얹힌 말들의 파편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작가지만, 동시에 상담자이고, 청자이고, 통역자이다. 타인의 삶을 언어라는 매개로 조율해 나가는 이 복합적인 작업은, 결코 단순한 집필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몰입이자 절제이고, 공감이자 거리 두기다. 그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내가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인생이 글로 정돈되는 그 순간의 빛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여성이 남기는 유서를 대신 쓴 적이 있다. 그녀는 책이 완성되기 전 세상을 떠났고, 그 책은 그녀의 남편과 자녀에게 전해졌다. 나는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그녀가 내게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작가님, 이건 제가 살아온 시간을 처음으로 정리해본 거예요.” 나는 그 말을 아주 오래도록 붙들고 있었다.
나는 왜 이 일을 선택했는가.
아마 나는,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은 할 수 있어도 글로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들, 삶의 무게에 눌려 기억은 있지만 그것을 언어로 빚어낼 수 없는 사람들. 나는 그들 곁에서 그들의 속도로 걸으며, 말보다 느린 숨결과 눈빛의 결을 받아 적는다. 때로는 침묵이 길고, 감정은 요동치며, 어떤 기억은 금이 간 유리처럼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섬세한 마음들을 하나하나 문장으로 엮어내는 이 일이야말로, 내가 이 일을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빌려 글을 쓰지만, 그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때, 글이 갖는 힘과 치유의 온도를 가장 가까이서 느낀다. 그 감각은 오직 대필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은밀하고도 깊은 특권이다.
그래서 나는, 대필 작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말보다 공기를 듣고, 말투보다 맥락을 듣고, 이야기보다 결을 듣는 사람. 그 이야기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그의 문장’이 될 수 있도록, 나는 나를 지우고 그의 언어를 살려야 한다.
이름 없는 존재로 남는다는 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나만의 방식으로 문장에 책임지는 길이다. 나는 내가 쓴 글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글이 세상에 닿을 수 있도록 가장 낮은 자리에서 떠받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일이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라면, 나는 오늘도 기꺼이 이 일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