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⑤]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①] '수원 박새로이' 꿈꾸는 정비병 김요셉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②] "군대가 사람 두 번 살렸죠" 배차계원 안홍준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③] '군대가 만들어낸 A급 용사' 버스 운전병 이준혁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④] '꿀보직일줄 알았지만...' PX병 곽도엽
적어도 20대에게 있어 군대만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든, 혹은 일찍이 사회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든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입게 된 대한민국 남성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였으며 까까머리가 되기 전까지 걸어왔던 길 또한 상이한 이들과 좋든 싫든 24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이 시간을 그저 전역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보내게 된다면, 너무나도 아깝지 않을까. 지역감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지역갈등인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계층의식을 갖고 있던 이에게는 계층차별 인식을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권범수 씨는 전역 전 휴가를 떠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말년 병장이다. 군대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그는, 군 생활에 대해 느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솔직히 긍정적으로는 느낀 점이 딱히 없다'고 즉답했다. 하지만 3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야말로 지난 18개월 동안 사회에서는 살 수 없었을 값진 것들을 얻어 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동기들과 지휘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랑스러운 몸을 만들었고, 항상 상상에서 그치던 진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주변에서 제시하는 길을 따라갔던 권범수 씨는 이제 자신이 직접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려고 한다. (본 인터뷰는 2021년 9월 11일에 진행되었다.)
처음 입대할 때부터 전문 특기병으로 통신병을 지원했던 것인가?
아니다. 어느 보직으로 가든 아무 상관이 없어 특기병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일반 보병으로 입대했는데, 훈련병 시절 친했던 동기 세 명이 모두 군사특기로 통신병을 써서 내더라. '에라 모르겠다. 친구 따라 강남 가자!'라는 생각으로 따라 썼다.
통신병 주특기가 훈련병 사이에서는 막연히 소총수보다 편하다는 인식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통신병이 됐을 때 '앞으로 꿀 빨겠구나' 싶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현시점에서는 통신병 보직이 어떤 것 같나?
음… 나는 대대 통신소대 무전병이다 보니까 비교적 힘든 일 없이 편하게 지내기는 했다. 대신 그만큼 휴가도 없었다.
무전병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무전병의 일과는… (침묵). 같은 통신소대에 소속되어 있는 야전가설병이나 전산병에 비하면 크게 하는 일이 없다. PRC-999K 무전기의 정비가 주 일과였다. 지정된 날짜가 되면 장비의 도약 코드와 시간값 등을 바꾸고, 타 중대의 999K가 고장 나면 고치는 일을 했다.
평소 일과 때는 하는 일이 없을지 몰라도 훈련 시에는 가장 바쁜 보직이 아닌가?
그렇다. 대대 무전병의 최우선 임무는 무전의 통신이 끊기지 않게끔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훈련 때 상당히 바쁠 수밖에 없었다. 999K 무전기를 매고 지휘관을 따라다니는 소대·중대 통신병과 달리, 대대 통신병은 '구구둘'이라 불리는 AS-992K 광대역 안테나를 설치한 다음 지휘소에 있는 999K가 개통해야 한다. 이 작업을 무전병 두세 명이서 20분 안에 완료해야 됐다. 길고 얇은 안테나가 한쪽으로 쏠리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맨땅에 말뚝질도 해야 했고, 소대원들과 합을 맞춰 안테나 설치와 망 개통을 빠르게 해내야 하므로 쉽지 않다.
대대 통신병으로 지내며 느꼈던 통신병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우선 본부중대 특성상 소대원들과 함께 한 사무실에 모여 같은 작업을 하다 보니, 동료들과 쉽고 깊게 친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대대 통신병으로서 부대 전체의 무선 장비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책임감도 많이 생겼다. 무엇보다 의미 없는 '뺑이'를 치지 않고 이유 있는 작업만을 하지 않는가. 내가 군인으로서 나라에 기여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점은 당직 근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신병 시절에는 다음 날 근무 취침을 할 수 있다며 좋아했지만, 이제는 생체 리듬이 망가져 계속 졸리고 하루종일 앉아 있으니 허리도 아프다. 너무 힘들지만 이 또한 내가 맡은 임무이기에 의무감을 갖고 임하는 중이다.
권범수 씨가 생각하는 입대 전의 자신은 책임감이 부족하고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것도 막연히 '대학 친구 좀 만들고 입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전역을 1개월 앞둔 시점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권범수'는 자대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후임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전역 이후의 미래를 위해 외국어 공부와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계획밖에 세우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됐다'고 돌아봤다.
훈련병 시절 불침번을 서면서 자아 성찰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이곳에서 할 일 없이 1년 6개월을 낭비하지 않고 무엇이든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공대를 다니고 있지만, 주변에서 남자라면 공대를 가야 한다기에 생각 없이 진학한 것뿐이었다. 그 선택에 대해 많이 후회했기 때문에 사회에서 다른 길을 걸어보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 준비의 일환이 바로 일본어 공부와 운동이었다.
일본어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입대 전에도 일본어에 관심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그런데 전역 이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중 어머니가 일본 사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를 이용해 일본 취업을 노려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대에 오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일본어 공부를 하려고 하니 필요할 때 도움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모습을 보며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1년 이상 부지런히 공부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 같다.
어머니께 어떻게 도움을 받았나?
공부를 하는 도중에 모르는 어휘가 나오면 카톡으로 여쭤봤다. 단어 같은 것은 전자사전이나 번역기 애플리케이션으로 알 수 있지만, 문장의 경우에는 번역기를 돌려도 어색한 문장이 나오지 않나. 그럴 때 어머니께 잘 모르는 부분을 보낸 다음에 이게 무슨 뜻이냐고 여쭤보면 바로 알려주셨다.
그런 식으로 카톡을 많이 하다 보면 어머니와 소통을 더 많이 하게 되는 등의 효과도 있었겠다.
그렇다. 일본어 공부를 이유로 카톡을 보내다 보면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나는 군 생활이 어떤지 등의 안부를 주고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연락하는 빈도도 늘어나고. 입대 이전에 비해 어머니와 많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권범수 씨는 일본 대학 유학생 출신 후임과 일본어로 유창하게 대화했던 때를 떠올리며 "일본어가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1년 넘게 꾸준히 공부하니 이어지는 대화에서 사용해야 할 단어가 머릿속에서 곧바로 떠올라,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재수에 성공한 다음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권범수 씨도 1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일본어 공부를 했던 경험이 자신감이라는 보상으로 이어졌을 듯하다.
자신감이 생겼다. 막연히 해외 취업을 생각하며 시작했던 외국어 공부가 이제는 유학까지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경제적인 이유로 아직은 보류 상태지만, 절대 포기한 것이 아니다. 전역하고 나면 아르바이트로 목돈을 만든 다음 열심히 공부를 해 유학을 가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여러 갈림길이 생겼다.
입대 전의 권범수 씨는 지금과 달리 상당히 마른 편이었다. 주변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를 볼 때마다 '운동 좀 해라', '밥 좀 많이 먹어라' 같은 말을 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는 전역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핸드폰 게임은 참아도 쇠질은 못 참는 운동광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운동 역시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며 동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훈련소에서는 간단한 푸쉬업 정도만 했다. 그런데 자대에 오고 나니 동기들이 개인 정비 시간만 되면 곧바로 체력단련실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더라. 나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됐다. (동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셈인데) 그렇다. 동기 덕을 정말 많이 봤다. 어떤 프로틴을 사야 하는가 같은 정보부터 시작해서 이 운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나 같은 정보까지 전부 공유했다.
스스로의 달라진 몸을 보면서 드는 감상은?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나도 가끔씩 내 몸을 보며 놀란다. 하지만 이를 주변에 드러내기에는 조금 자기 과시가 심한 것 같아서, 그냥 혼자 '내가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만다.
주변의 권유에 따라 공대에 진학했으나 그곳에 자신의 꿈은 없었다. 어떻게든 공대를 다니며 이공계 계열 공부를 했지만 나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계속 붙들고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 권범수 씨에게 체육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고등학생 시절의 꿈을 되살려준 것은, 목표 의식을 잃고 방황하던 자신을 향한 중대장의 한 마디였다.
체대 입시 생각은 언제 즈음부터 했나?
이전부터 자신에게 어느 정도 운동 신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스포츠를 하든 빠르게 습득했고, 좋아하는 종목도 많다. 그래서 체대로 진학해 지도자나 물리치료사 같은 일을 하고 싶었다. 다만 자주 하는 생각은 아니었고 가끔씩만 생각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럼 체대 입시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얼마 전 중대장님과 상담을 하고 나서부터다. 일과 시간에 생활관에서 숨어 잠을 자다가 행정보급관님께 걸려, 대차게 깨진 적이 있다. 소대장님께 꾸중을 듣고, 그다음으로 중대장님께 불려갔다. 그런데 중대장님께서는 왜 일과 시간에 잠을 잤냐며 다그치지 않는 대신,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더라. 중대장님과의 상담 이후 성찰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 과정에서 체대 입시 준비를 '할까?'가 아니라 체대 입시 준비를 '해야겠다'로 바뀌었다.
그럼 전역하고 나서의 계획은 체대 입시 준비와 관련된 것이겠다.
군 생활 도중에 허리 디스크가 생겨서 실기 준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허리가 나아야 하는데, 우선 병원 좀 다녀보고 재활을 하고 나서 생각하려고 한다.
30일의 군 생활이 남았다. 그동안 군 생활에 대해 느낀 점은?
내 성격이 조금 자기중심적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귀담아듣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군대에 오고 나서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말을 듣고 공감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후임도 잘 챙겨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계획을 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는 법도 배웠다. 여러모로 많은 배움을 얻었는데, 이게 바로 군대에 와서 좋았던 점이 아닐까 싶다. 다만 앞선 이야기와는 별개로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일거수일투족을 통제받는 것의 괴로움을 느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10월 31일에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갈 예비역 병장 권범수에게 한 마디 부탁드린다.
말년에 다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전역한 권범수! 그동안 고생했다. 너에게 수고 많았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