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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Vagabond Nov 01. 2020

페르소나

무엇이 당신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가

안녕하세요. 부지런한 백수입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먼저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존재의 의미"라는 보이지 않는 딜레마에 빠지면서 "목줄 끊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습니다. 제 삶의 안팎을 관찰하면서 제가 얽매이고 있었던 "목줄"들을 찾아서 하나씩 끊어내고 자유인으로는 돌아가는 것이죠. 그러면서 저에게 닿았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이야기들을 정성스레 엮어내어 "인간은 싫지만 흥미로워"라는 책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발견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저를 힘들게 하는 그 무언가는 결국 제 안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계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모든 순간에, 제 안에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없었다면 그 어떤 모순도 저에게 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상처를 받으면서 알아갈 수밖에 없는 아주 인색한 원리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죠. 개인의 자유의지를 획득하려고, 또 설득하려고 십여 년을 발버둥 쳤던 저였지만 사회적 관계가 없을 때 개인주의도 존재할 수 없음을 저는 깨닫는 중이었습니다.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는지요.


페르소나는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누구의 엄마, 작가, 교수, 팀장, 사장 등은 모두 하나의 페르소나이고 하나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추구하는 이미지가, 각자 수행해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의 역할일 뿐이죠.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며 관계를 유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나의 이상향을 열심히 빚어놓고 고작 그 하나의 페르소나에 나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오류 앞에서 유약해진다고나 할까요. 내가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역할이 나를 지배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아주 흔해지게 되죠. 한국은 특히나 일터, 직업, 프로의식, 사회성 같은 것들이 등이 매우 중요시되는 사회입니다. 외길만 걸어온 전문가들이 인정을 받는 사회분위기의 이면에는 여러 개의 "세포핵"을 품고 있는 내면의 실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청춘들이 득실대고 있죠.


"너는 꿈이 뭐야?"

"하늘을 날고 싶어요."

"아, 파일럿이 되고 싶구나."


이는 타일러가 "꿈"을 주제로 세바시 강연을 하던 중에 등장시켰던 대화입니다. 어른들은 아이의 꿈이 하나의 역할로 정의되도록 유인합니다.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역할일수록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모든 시간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그 배역과 나 자신이 근본적으로는 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한없이 애쓰게 만들더라고요.


때로는 확립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죠. 이상적 자기상으로 담았던 모습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기대를 포기하는 자아도 모두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습니다.


자아 확립;

자의식의 과잉이나 분열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아를 통일시키고 확립하는 일


자아가 어떻게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될 수 있을까요? 살면서 수많은 페르소나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초조해질 수밖에 없겠죠. 저도 여전히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를 의식하기 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말이죠. 여전히 제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상반되는 모습이 튀어나올 때: 예를 들면 좋은 영감을 주는 사람이고 싶은데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스스로가 문득 느껴질 때 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역할수행 중에 좋은 영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또 저를 페르소나에 일치시키려는, 말하자면 거꾸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죠.


그렇게 페르소나가 제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고 저는 그 역할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진짜 저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페르소나는 팽창했습니다. 이와 상반되는 저의 모습은 더욱더 용납하기 어려워졌고 점점 응어리지고 억압되면서 폭력적인 그림자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 그림자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저를 굉장히 예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관계를 유지했던 시간의 잔여는 자아와 비 자아의 틈새에서 공격적인 고정관념으로 쌓여갔습니다. 저는 그 틈새로부터 오는 꾸준한 상처를 무방비상태로 겪어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칼 구스타프 융이 써내려갔던 많은 문장들은 상담치료와 함께 저에게 적지 않은 힌트를 주었습니다. 남에게 있던 것처럼 보였던 문제는 사실은 제 안에 있었고 인정하지 못하는 자아를 꾹꾹 눌러 담을수록 무의식 안에 엉켜버린 그림자는 점점 진해졌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경험이 저의 고정관념을 축적하는데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내기에는 저의 지식이 한없이 부족하더군요. 그러나 어떤 고정관념이 저에게 쌓여있었는지는 노력으로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무례하고 싶지 않다는 고정관념은 무례한 사람 앞에서 저를 유리 멘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 힘겨운 순간이 되어서야 고정관념은 하나씩 수면 위로 드러났었고 저에겐 무례하지 않은 모습을 하나의 페르소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벗어날 수 있는 퇴로를 하나 만들어 둘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하면 이해가 되실런지요.


페르소나는 언제든지 썼다가도 벗을 수 있는 가면입니다. 우리가 이뤄내야 할 궁극적인 목표 따위가 아닙니다. 자신을 페르소나에 일치시킬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이죠. 상황에 맞는 사회적 역할을 소화해내면 되는 것입니다. 무례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면 됩니다. 막은 곧 내리고 저는 곧 집에 가는걸요. 뭐 꼭 완벽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관계에서 상처 받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저는 이 책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원래 싫지만 흥미로운 존재인걸요. 아무도 그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괜찮아요. 정말 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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