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언어-스페인어로 살다 #8
좀 촌스러운 이야기지만 스페인에 갈 때 내 가방 구석구석 차지했던 비상식량은 다름 아닌 ‘믹스커피’였다. 회사 다닐 때 하루에 거의 서 너 잔을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였고, 짧은 여행길에도 꼭 가지고 가서, 세리머니처럼 마시곤 했기에 음료라기보다는 일상의 필수 소품 같은 것이었다.
마지막 짐을 싸는 날 나의 믹스커피 사랑을 하는 친구가 선물한 100개 세트를 욕심스럽게 꾸역꾸역 가방에 넣었다. 마치 가면 커피만 마시고 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스페인의 밀크 커피 (Café́ con leche 까페 꼰 레체) 맛에 바로 적응이 되었다. 스페인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의외로 ‘에스프레소’를 즐기지 않는다. 대신 일상적으로 마시는 달달한 스페인의 까페 꼰 레체는 나의 입맛에 딱 맞았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 나에게는 거의 매일 커피를 마시러, 맥주 한 잔을 하러, 아침을 먹으러 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피올라'였다. 집에서 가까운 광장에 있는 바였는데, 처음 세비야에 도착했을 때 한국과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가 없어서 아쉬웠을 때 발견한 곳이었다. 인터넷도 다른 곳에 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피올라에 있어? “
"피올라에서 볼까?"
내가 항상 피올라에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과의 약속도 언제나 그곳이었고 그들은 피올라를 ‘나의 바’라고 불렀다. 스페인 친구들 뿐일까. 스페인에 놀러 와 세비야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한국 친구들도 가끔 세비야에서 기억나는 장소를 이야기하면 이곳을 떠올린다. 잠시 나의 일상에 동참하는 시간에 피올라의 시간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Café con leche, por favor 까페 꼰 레체, 뽀르 파보르(밀크 커피 한잔 주세요)”
매일 똑같은 것을 주문하고 얼굴을 익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이상 주문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알고, 알아서 내어주는 관계들이 있던 곳, 서울살이에서는 쉽지 않은 단골이 된 곳이었기에 스페인을 떠날 때쯤엔 곳곳에 훨씬 더 세련되고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많이 생겼지만 나는 줄곳 피올라의 단골이었다. 세비야를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식사 역시 그곳에서였다.
하루의 어느 시간 즈음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시던 커피 한잔, 더운 여름 저녁 친구와 홀짝이던 여름 와인 한잔, 머리 지끈거리는 스페인어 수다와 함께 하던 맥주 한잔들이 담긴 피올라의 시간 속에는 세바야에서의 누군가와의 관계, 나의 시간과 해를 지나며 바뀌어 가던 마음들, 그런 것들이 담겨있다. 내가 '피올라'를 기억하는 일은 그런 것이다. 삶의 어느 시간을 마셨던 공간에 대한 기억 말이다.
Salud살룻 (건강)! 스페인의 건배사는 ‘salud'이다. 건강이라는 뜻이다. 술을 마시며 건강을 외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에게 맥주는 행복해지는 요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salud은 스페인에서 재채기를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외쳐주는 말이기도 하다. 지역에 따라 jesus헤수스(예수)를 외치기도 하는데 그러면 재채기 한 사람은 일일이 ’ 그라시아스‘라고 감사인사를 해야 한다. 한 사람이 재채기라도 할 때면 온통 건강과 감사가 넘쳐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