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마음속 마지막 일정은 남미 최대의 박물관이라는 멕시코 인류학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저녁 비행기 시간까지 시간이 좀 있었기 때문에 인류학 박물관을 서너 시간 둘러보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버를 불러 인류학 박물관 앞에 내렸을 때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유러피언 커플이 박물관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뒤를 따랐는데 그들이 맥없이 발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아뿔싸. 오늘은 박물관 휴관일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하루 전인 월요일은 정기휴관이었고 이튿날은 베니토 후아레즈 기념일.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끼어있던 오늘까지 공휴일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멘붕 상태가 됐다. 뭘 해야 될지 막막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끌면서 인류학 박물관 앞 공원을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대략 3,40미터쯤 돼 보이는 높은 철 기둥이 있었고, 아래에는 네 명의 무희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넓고 둥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공연을 기다렸다. 나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볼라도레스를 준비하는 무희.
비눗방울 놀이.
볼라도레스를 시작하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이들이 펼쳐 보일 공연은 볼라도레스라는 공중곡예였다. 멕시코 동부 베라크루스의 작은 소도시 파판틀라의 토토낙 인디언들이 농업과 풍요의 신에게 지상의 축복을 기원하며 30미터 높이의 기둥으로부터 52바퀴를 회전하면서 내려오는 일종의 제례의식이다. 사실 난 이 장면을 세계 테마 기행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볼라도레스 계승자는 예닐곱 살 때부터 이것을 시작한다고 한다. 드디어 피리소리와 함께 이들이 힘차게 회전을 시작했다. 사람이 스스로 새가 되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빙글빙글 돌아 내려왔다. 색동옷을 입고 피리와 소고를 연주하며 하늘을 휘휘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아슬아슬한 스릴이 느껴졌다. 일종의 기우제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하고도 비가 안 내렸을 때 그 옛날의 무희들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인간의 기원이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신념과 믿음은 다양한 종교의 형태로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 2009년에 이 볼라도레스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됐다. 인류학 박물관은 놓쳤지만 우연히 볼라도레스를 보게 되어서 좋았다.
네 명의 무희들이 회전하면서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회전하면서 피리와 소고 연주까지 한다.
알타이계의 특징인 색동이 눈에 들어온다.
땅에 스칠 듯 바닥까지 내려온 무희들의 회전은 약간의 스릴이 있다.
이분이 이 팀의 대장인 듯.
침대 같은 벤치. 낮잠을 청하기에 딱이다.
볼라도레스를 보고 나서 딱히 짐 들고 할 일이 없어서 침대 같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한참 있었다. 따뜻한 봄날의 강아지 마냥 가만히 누워 있자니 문득, 소대원들을 이끌고 부대 뒷산에 교육훈련 간답시고 나섰다가 어느 이름 모를 묘지 주변에 다 같이 널브러져 한참 오침을 취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멕시코의 따뜻한 봄볕과 잠시의 노곤함이 이끌어낸 옛 추억 속 장면... 딱 그만큼의 기온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캐리어를 끌고 소나로사로 걸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고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갔다. 평생 택시 탈 일이 별로 없었는데 멕시코에서 만큼은 원 없이 우버를 불러봤다.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큰 기대 없이 왔던 멕시코시티는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음속에 각인됐다. 몇 군데 둘러보지 못한 곳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아쉬움이 나를 또 다시 이 도시로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와 보고 싶은 동네. 이제 굿바이다!